왜? 이제야 보이는 겁니까?
어버이날, 큰형님으로부터 눈물로 쓴 편지가 SNS 상으로 도착했습니다. 읽다가 만 가지의 상념이 밀려왔습니다. “저 흘러가는 구름 사이사이 비추는 푸른 하늘을 향해 오래간만에 외쳐보는 이름 아버지, 그런데 가슴이 왜 이렇게 메워져 오는 겁니까? 식솔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매사에 좋다 나쁘다 감정 표현 떳떳이 한번 못하시고 보여서는 안 된다는 남자의 눈물을 스스로 삼키시며 속으로만 울었던 나의 아버지. 그때 그 시절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당신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이 불효막심한 이 자식 눈에 고개 떨구며 죽쳐졌던 당신의 뒷모습이 왜? 이제야 보이는 겁니까? 그것은 당신께서 일부러 만들어내신 신파극이 아닌 당신의 인생이며 당신의 삶이며 당신의 운명이었거늘, 이 불효자는 당신의 그때 그 연세를 훌쩍 지난 이 나이가 되어보니 후회의 눈물이 왜 이리 흐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뻐꾹새 우는 저 하늘 저편으로 가신지 어느덧 11년이 되셨습니다. 모든 게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저는 막내입니다. 그래서 큰형님이 당시 맏이로서 감당해야 했을 무게에 대하여 전혀 철이 없이 체감하지 못했던 터라, 큰형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긴장감을 무시하고 큰형님을 시큰둥 바라보았던 바로 그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큰 형님은 올 해, 육십 중반의 나이에 있습니다. 아버지를 하나님의 나라에 파송하고 난 뒤, 저는 두 형님들에게 존대어를 씁니다. 아버지의 다음이 형님들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2019년 어버이날, 큰형님의 이 글을 받아 읽고, 가슴으로 울었습니다. “이 불효막심한 이 자식 눈에 고개 떨구며 죽쳐졌던 당신의 뒷모습이 왜? 이제야 보이는 겁니까?” 왜 이제야 보이는 겁니까? 큰형님의 글이 크게 보였습니다. 왜? 저도 이제야 보이는 불효막심한 또 한 명이니까요. 또 하나의 글을 인용하고 오늘은 목양터 이야기마당을 줄이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읽은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계란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바위는 죽은 것이다. 기막힌 성찰입니다. 오늘 수요 예배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자식 여러분! 당신의 부모님들은 평생 동안 자식의 승리와 행복을 위해 무모하게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인생을 사신 분들입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그런 게임을 어리석게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계란은 부모들이 갖고 있었던 사랑이라는 살아 있는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그 사랑을 전폭적으로 나에게 주신 부모님들의 사랑에 감사하는 귀한 자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2019년 5월 8일 수요예배 설교 원고 중에) 화요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하고 계실 어머님 92번째 생신입니다. 해서 아버님의 유해와 함께 안장되어 있는 이천 호국원에 다녀올까 합니다. 가서 큰형님의 이 글을 읽어드리고 올까합니다. 물론 벌써 알고 계시기는 하겠지만. 정말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