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글을 쓰는가?
목회 현장에서 사역을 한 지 30년이 지났습니다. 부교역자로 사역을 한 것이 목회 여정 중에 11개월이다 보니 저는 개인적으로 담임목회의 이력이 제 목회의 거의 전부인 셈입니다. 담임 사역을 하면서 30년 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주보에 올린 목회 단상에 대한 글쓰기였습니다. 286 컴퓨터를 사용하던 그 아득한 시기부터 지금까지 보관해 놓은 글들이 약 1,500페이지 정도로 보관되어 있는데 때때로 들추어보면 두 가지의 소회가 듭니다. 하나는 이 걸 글이라고 썼나! 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나름 성장했네! 의 대견함입니다. 물론 착각은 자유지만.(ㅎㅎ) 제가 참 좋아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치열함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책읽기와 글쓰기에 있어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작가 정희진은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도전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죽었다. 책은 독자가 다시 쓴다. 책이 되지 못한 책들의 피해, 비평되지 않는 비평의 폐해는 수많은 책을 읽는 ‘나’에 의해 청산될 수 있다.”(“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간,pp,305-306) 이 글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든 것이 있었습니다. 만에 하나 내가 글을 쓴다면 두 가지의 수지맞는 장사를 할 수 있겠다는 아주 세속적인(?) 생각을. 첫째는 나를 정화할 수 있겠다는 것과 둘째는 남을 정화할 수 있겠다는 목사로서의 직업의식 발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나름의 도발은 나에게 정말로 그런 보물을 던져주는 행운의 큐피트 화살이 되어 날아왔습니다. 글을 써야 하니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나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석학들과 앞서가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범접할 수 없었던 통찰과 혜안이 고스란히 내 것으로 질량 변화를 해주었습니다. 질량이 변화된 수없이 많은 보물들은 자칫 잘못하면 망각이라는 괴물에 사로잡혀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기억에만 머물게 할 수 없어 펜을 들었고, 키보드를 친구로 삼아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글쓰기는 적어도 나에게 엄청난 보너스를 주었는데 목사로 살아가는 나를 천박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고, 사유와 성찰을 끊임없이 행하게 했음은 물론, 설교라는 것을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가장 큰 무기들로 남아 주었습니다. 오래 전, 할리우드가 최고로 인정하는 작가 스티븐 킹은 이렇게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부디 실컷 마시고 허전한 속을 채우시기를.”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간, p,334.)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이 물을 마시려고 합니다. 공짜로 주어지는 물도 못 마시는 바보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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