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플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병세가 악화되어 도저히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그의 뒤를 이어 부통령이었던 해리 투르먼이 직을 이어 받으면서 했던 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곤 합니다. “하늘의 별들이 다 나에게 떨어지는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임했다.” 여호수아는 어땠을까 싶어 구약의 여섯 번째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1:5-9절까지 모두가 다 여호수아를 격려하는 메시지로 도배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접근해 본다면 확언건대, 모세의 리더십을 이어 받은 여호수아 역시 트루먼의 심리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임했으리라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당부하신 내용 중에 상당수를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메시지에 천착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모세의 부재라는 하늘이 무너지는 공황 상태를 경험한 여호수아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 중에 제일 무게감을 두는 내용을 여호수아 1:7절의 말씀에 두기를 좋아합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바로 이것,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우리 세인 교회는 정치적인 성향이 우측에 있는 교우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저의 개혁적인 설교를 들으면 머리를 숙이거나 얼굴에 인상을 찌푸립니다. 반대로 우리 교회의 젊은 교우들 중에는 좌측에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너무 상투적인 보수적인 메시지를 언급하면 앞선 우측에 있는 분들의 반응과 별 반 다름이 없이 저에게 압박 아닌 압박을 줍니다. 해서 경우에 따라 거친 세상 말로 목사질(?)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대처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배우는 교훈과 공부가 있습니다. 무엇일까? 그래서 목사에게 절절한 목양의 패러다임이 바로 균형이라는 각인입니다. 지난 학기 대학원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마지막 강의에서 제 마음에 담은 진정성이 있는 권면을 이렇게 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목회는 철저히 보수적으로, 그러나 신학은 포용하는 진보성으로” 많은 학생들이 이 멘트에 대하여 호불호를 가졌다는 후담도 들어보았습니다.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했습니다. 개혁적인 신학을 경험해 보지 못한 학생들은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며, 상투적인 것에 식상해 있는 학생들은 신선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권고를 한 것은 누군가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일설(一說)이 아니라 균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수구적인 보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남 좌파도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쓰러져 가고 있는 조국교회를 아파하는 개혁적인 동역자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렇게 무너지고 있는 조국교회를 마치 확인 사살하는 것같이 무너뜨리는 급진적인 사람들과는 대항하여 싸웁니다. 제사장이 제사장 아들에게 세습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대드는 수준 이하의 신학적 궤변을 늘어놓는 대화자체가 안 되는 무식한 자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지만, 거침없이 나를 버리라고 역설하며 사역의 현장을 떠난 보수적인 성향의 거인들을 존경하고 또 존경합니다. 국제성서주석을 통해 엄청난 신학의 혜안을 넓히는 도움에 감사하지만, 메튜 헨리의 타협할 줄 모르는 보수적인 주석에도 감동을 받습니다. 김기석 목사의 설교에 열광하며 감동받지만, 유기성 목사의 설교도 진중하게 경청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저에게 회색주의자라고 공격하겠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회색이 무슨 색인지 잘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색깔이 십자가의 도라는 색인 것을 아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2019년 1월을 시작하며 제발, 조국교회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를 소망해 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