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원에서 거주한 일주일동안 교회에서 매일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수염 안 깎기’ 덕분에 내려오는 금요일에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깎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가 흠칫한 것이 있었습니다.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의 모양새가 검은 것이 아니라 희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동안에는 매일 수염을 정리해서 몰랐던 것뿐이었지 이미 제 신체 구조에서 수염이 희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진행된 과거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인지 능력이 인간에게는 민감하게 나타납니다. 오장육부의 기능도 그렇고,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사람의 겉모습도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감각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지난 주, 교회 지체가 제게 상의할 일이 있어 잠간 사무실에서 면담을 하고 돌아가며 이렇게 되뇌어 주었습니다. “목사님, 아니 머리에 흰머리가 너무 많아요. 언제부터 그렇게 흰 머리가 많아졌어요?” 듣고 그냥 웃으며 한 마디 했습니다. “이제 저도 내일 모레면 육십인 걸요.” 한 주간 머물렀던 수양관은 약 20년 전, 팔팔했던 젊은 목사 시절에 당시 유명했던 목회자 세미나가 정기적으로 열려 자주 찾던 곳이었습니다. 이번에 학교 강의와 맞물려 가까운 그곳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수양관은 나이가 들어버려 여기저기 손보아야 할 곳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년 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으니 말입니다. 여기저기 늙어버린 수양관의 흔적들이 왠지 저의 시간의 흐름 속에 공명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우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쓸쓸한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20년 전에 흐르던 계곡의 물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이른 아침 울어대던 각종 새들의 활기찬 날 밝음의 전령 소리도 변함이 없이 상쾌했습니다. 날씨가 쌀쌀했지만 수양관을 걸으면서 20년 전, 빠른 속도로 산책하던 속도보다는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산책을 하며 얻는 영감은 저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로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니, 조금 더 좋아진 것이 있음도 발견했습니다. 가벼움이 아닌 묵직함, 얕음이 아닌 깊음, 그리고 빠름이 아닌 느림의 미학이라고 붙여도 손색이 없는 그 무언가가 한 주간 내내 저를 휘감아 주고 있음이 그랬습니다. 해서 참 감사했습니다. 이 휘감음의 실체를 알고 있었던 재독학자 한병철은 그래서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전반적으로 삶의 과정이 가속되면서 인간은 사색적 능력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오직 사색적인 머무름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갇히고 만다.”(한병철, “시간의 향기”,p,114.) 놀라운 통찰입니다. 앞으로 더 들어가는 나이 듦 앞에서 추해지지 않도록 더 깊이 사색하고 성찰하는 목사가 되어 보기로 다짐해 봅니다. 조지 윈스턴의 ‘DECEMBER’ 가 서재의 공간을 가득 채우는 시간, 나만의 행복으로 내일을 꿈꿔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