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지 않기 좀 알려주세요!
한국교회를 섬기는 담임목사들의 설교 수는 가히 살인적입니다. 주일 예배 설교는 물론 주중에 있는 여럿 공 예배 설교 그리고 각종 심방 예배 설교는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설교의 마지노선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횟수로 부담을 주는 설교를 택하라면 부동의 1위가 새벽 설교일 것입니다. 해서 새벽예배 설교는 각 교회에 상황에 맞게 여러 가지의 방법(큐티 설교, 요약 설교, 아침 묵상 자료집 나눔 등등)으로 목회자들에 의해서 취사선택되지만 부담감이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동일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2년 전부터 이런 담임목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성서일과를 통독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치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성경을 묵상하는 효과는 물론, 설교자로서 새벽 설교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너무 고마운 팁까지 주고 있는 새벽예배 성서 일과 통독 사역은 정말로 엄청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헌데 그렇게 시작된 고마운 성경 통독 사역에 복병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노안이 시작된 고로 돋보기는 아니지만 책읽기를 위해 만든 안경을 끼고 통독을 인도해도 아주 가끔, 나이가 나이인지라(ㅎㅎ), 그리고 새벽예배의 몽롱함(?)때문에 한 구절씩을 건너뛰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는 씁쓸함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새벽예배는 무반주로 찬양을 하다 보니 이전에는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한 찬송가 음 이탈의 참사까지 자행하고 있다는 아내의 서슬 시퍼런 보고로 인해 그때마다 기가 죽는 성경 통독의 감추어진 또 다른 비애가 저에게는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한 구절을 건너뛰면 사랑이 충만한 교우들은 놀라운 순발력으로 알아서 역시 한 구절을 건너뛰는 보폭 맞추기를 이제는 일상화시켜 주어서 제가 틀렸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게 해주는 환상의 조합이라 할 수 있는 목사와 성도들의 하이파이브가 있다는 점입니다. 벌써 이러면 되겠느냐는 아내의 서릿발 충만한 야단을 맞는 것도 이제는 인에 박혔는지 아내도 예전보다는 야단의 강도가 약간은 주춤하는 듯 해 더 씁쓸합니다. 이제 이순의 나이에 가까운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이 정도인데 70세를 훌쩍 넘기고도 현장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운동을 벌이고 있는 목회자들은 정말로 존경의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하비루의 코헬렛이 노래한 이 구절이 지천명의 말미에 있는 저에게 요즈음 피부에 더 새겨지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세월이라는 숙명 속에 살아가는 나를 거부하려는 교만과 대항하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욕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 때문입니다. 적어도 추하게 늙어서야 되겠는가의 다짐, 그리고 멋진 나이 듦이라는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으려고 합니다.
나름 거창하게 말했는데 소박한 소원 하나 말하고 싶습니다. 한 구절 건너뛰지 않고 성경을 읽는 방법, 누가 좀 가르쳐 줄 수 없나요? 아내에게 야단 좀 그만 맞게.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