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에 장모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이후, 저와 제 아내는 말 그대로 고아가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처가의 부모님들이 다 소천하신 후에 맞는 명절은 의미가 무척이나 다른 명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친가나 처가나 형제들이 고향에 있지만 왠지 부모님이 안 계신 고향에서 맞는 명절은 텅 빈 마음을 쓰리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어 마음을 아리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있었던 추석 명절 연휴 기간 동안 그럼에도 고향을 찾았습니다. 어머님 역할을 하는 누님이 계신 집에 형제들과 함께 모여 추도예배를 드리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조카들의 근황도 알게 되었습니다. 명절에 부모님은 안 계시지만 고향을 굳이 찾은 이유는 동기간의 우애를 다지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더 더욱 욕심을 낸 이유는 아들을 비롯한 조카들 때문이었습니다. 명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 세대 간의 모임을 갖지 않는 것이 고착되면 아들도, 조카들도 저희들 세대 이후에도 모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것이 자명하기에 교육적인 차원에서 고향을 향했습니다. 조크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도시에 만들어지는 아파트들의 이름을 왜 그리 어렵게 짓는지에 대한 조크를. 정답은 시어머니들이 찾아오기 어렵게 하려고입니다. 이에 질세라 그런데도 시어머니들이 며느리가 있는 집을 찾아가는 이유는 시누이를 대동하기 때문이라고. 가정이 가정인 이유는 무엇이든지 이해하려는 부모와 형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헌데 오늘 우리가 만들고 있는 가정은 그 부모와 형제를 격리시키려는 비인간애가 점령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정마저도 물질적인 가치로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천박한 자본주의적인 잣대가 꿈틀거리는 것은 아닌지. 추석 명절에 하나님께 드릴 추모 예배 순서지를 만들면서 본문을 사무엘상 22장으로 택했습니다. 다윗이 아둘람에서도 신변을 보장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이방의 땅인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나가 가족들의 안전을 부탁하는 장면을. 자신의 몸 하나를 건사하기에도 숨찬 그 시기에 부모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그 기사를. 다윗이 보인 효를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시대인데, 그 가정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시대인데 그럼에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지키고 사수해야 할 보루는 가정인 것을 알기에 앞으로도 가정 공동체를 위해 조금은 더 수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잠겨 본 추석 명절을 지냈습니다.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은 고아로서 용기를 낸 고향 방문이었지만 막내 동생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누님과 형님들 때문에 너무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 돌아온 고향에서의 추석 보내기였습니다. 모두가 건강하기를 기도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