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목사님컬럼] 뺄셈의 미학2024-04-17 15:51
작성자 Level 10

뺄셈의 미학 


글 좀 짧게 써라 


교단 신학교에서 오랜 동안 후학들을 가르치며 한국교회에 지대하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친구 교수가 필자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쓴 소리이다필자는 섬기는 교회에서 일체의 모든 설교를 강해 설교로 진행한다뿐만 아니라 강해 설교 원고의 전문을 홈페이지 설교 콘텐츠 란에 링크한다강해 원고의 수준 자체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낙제점 이하의 글이지만이런 고된 일을 고집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첫째글을 공개하였을 때 온라인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에게 형편없다는 비판을 극소로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부하게 되는 유익 때문이다둘째표절에 대한 경계를 위한 대단히 좋은 견제 장치이기 때문이다누군가에게 내 글을 소개하고 드러낸다는 것은 무섭고 떨리며 편안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그래도 은퇴를 하는 날까지 이런 제어 장치를 가동시킬 생각이다.

글을 쓴다는 점은 설교 원고 작성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필자는 근근이 활동하는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일에 소홀하지 않은 편이다글 내용은 다양하다목사이기에 당연히 목양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잡다한 일들을 글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한다또 한편으로는 그런 대로 목사로서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인 책읽기에 대한 사후 작업인 북-리뷰로 통칭되는 서평 쓰기와 모 기독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을 연계하여 소개하는 등등이다.

이 모든 것이 글쓰기로 이루어지기에 필자에게는 적어도 글 읽기와 글 작성은 대단히 중요한 내 삶의 한편이 아닐 수 없다문제는 일련의 작업들을 하다 보니 밑천도 들어나고꾀도 나고무엇보다도 일천한 실력으로 인한 박약함 때문에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아 글이 길어지는 것을 경험한다이것을 파악한 지성적으로 아주 예리한 친구가 아주 집요하게 필자의 글에 시비를 건다그리고 비수와 같은 말을 던진다.

글 좀 짧게 써라!”

친구의 자문에 정신이 번쩍 들어 글을 쓸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글 길이이다가능하면 단문으로그리고 함축된 언어를 찾으려고 한다어디 이뿐이겠는가할 수 있는 한 반복적인 어구들을 과감히 생략하려고 무던 애를 쓴다. 40분 설교를 30분 설교로 줄이는 피나는 노력을 현재진행형으로 감당하고 있다어떤 일이 있어도 칼럼 형식의 글은 10 포인트로 A₄ 용지 2매를 넘기지 않겠다는 비장한 마음을 갖고 투쟁하는 과정에 있다헌데 이 과정을 경험하면서 필자는 생각하지도 못한 은혜(?)를 경험하곤 한다무엇일까조금 거창하게 표현해 보자.

뺄셈의 미학이다.

무슨 철학적인 수사어로 보이는 표현이지만 난 개인적으로 이 표현이 참 마음에 든다모든 목사들의 로망이 있다면 선포하는 설교에 대한 자기만족이다설교 행위를 자기만족이라는 결과물을 기대하며 행한다는 자체가 설교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빵점인 것을 알지만 솔직한 고백이다. 30년이라는 세월을 교회 강단과 함께 살아온 현장 목회자이기에 필자는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자기만족이라는 정서를 갖고 설교를 하면 안 되는 것을 안다근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해서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 자꾸만 욕심나는 것이 있다많은 것을 전하고 싶은 욕망이다이것도저것도 함께 전하고 싶은 욕망 말이다.

훌륭한 설교가 무엇일까내 욕망의 언저리에 있는 모든 것을 설교라는 도구를 빌미삼아 두루뭉술하게 전하려는 것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아닐까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인데마치 그것을 주군을 향한 신앙으로 매도하여 강제하고 압박하려는 시도는 아닐까.

한국교회 강단을 나름대로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친구 목사가 언젠가 필자에게 사석에서 이런 말을 전해 준 적이 있었다.

이 목사난 설교 원고를 다 작성하고 나서 꼭 하는 게 하나 있다내 의지의 표현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delete key 누르는 작업이야!”

신학교에서 동문수학한 참 격이 없는 친한 친구의 말이었지만 순간 그의 소리가 벼락과 천둥소리로 들렸다빼야 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삭제 버튼을 누르는 것은 오늘 교회를 섬기며 살아야 하는 필자를 비롯한 조국교회를 섬기는 모든 목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하는 죽비이다.

로고스서원 대표인 김기현 목사가 쓴 말씀 앞에 울다.’를 보다가 그가 직시한 웃픈(?) 글을 만나게 되었다그는 독자들이 너무나 잘 아는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 추려지는 사사기 본문을 예로 들며 이렇게 갈파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지만사람 수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내 자신의 힘으로 성장시켰다고뭔가를 성취시켰다고 까불어대는 이들을 가려낸다어중이떠중이 신자를 골라낸다기독교인 수가 줄어든다고 걱정이 많다그러나 아직도 많다.”(p,70)

김 목사의 글을 읽다가 필자는 이런 감정이입이 되었다목사로 살면서 내 욕망의 어중이떠중이를 골라내야 한다고 말이다이 작업은 지난(至難)하고 고루(固陋)하기까지 한 일이지만구렁이가 담 넘어가는 모습으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목사의 삶이어야하지 않나 싶다그러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 뺄셈의 공식이 내 안에서 가동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류 문학비평가인 레베카 솔닛은 어둠 속의 희망에서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의 회고를 소개하고 있다.

생각이 총보다 더 위험하다우리는 적이 총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생각을 갖는 것을 왜 허용을 하겠는가?” (p,56.)

동서고금이라는 시간의 간극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의 간극과는 전혀 상관없이 함께 공통분모를 갖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각한다는 것의 위대함일 것이다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복이다그러나 반면생각하기에 따라 최고의 위험한 요소일 수도 있다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이런 무모한 도발을 하고 싶었다그래도 난 목사인데그래도 난 영적인 영역을 다루는 목사인데 생각을 위험한 것으로 이용해서야 되겠는가의 도발 말이다목사로 이 땅에서 작금 살아가는 것처럼 살얼음판을 걷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목사가 현장에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며 주군이 행하셨던 삶을 따라가기 위해 고투한 결과 나타내야 할 생각은 공동의 선이어야 한다는 자존감이 필자를 엄습한다.

수려하고 미려한 수사어구들로 무장하여 교회를 사유화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시하는 일부 비상식적인 부류들이 있다이런 일로 인해 세상 사람들도 상식적으로 동의하지 않아 천박하다고 쪽팔림(?)을 당하는 목회자가 되어서야 되겠는가민초들은 구조적인 악과 천박한 자본주의라는 괴물로 인해 항상 을()에 처져 있어 갑()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하고 있는데도 일부 교회들은 기득권 정권의 나팔수가 되기를 자청하여 그들에게 예언의 목소리는 고사하고 길()예언의 흥을 돋우는 이 시대의 아마샤와 시드기야가 되고 있으니 참담하기까지 하다.

오늘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물론 내 사랑하는 조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것도 갖고 싶고저것도 갖고 싶은 욕망의 불순물들을 빼내는 뺄셈이라는 여백이다그렇다욕망을 빼내지 않고 조국교회의 미래는 암담하다그래서 주군께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키리에 엘레이손!

10 포인트로 A₄ 용지 2매를 넘지 않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