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고마운 세인 교회
욥기를 강해한지 4주가 되었다. 3주 동안은 욥기 강해를 위한 사전적인 이해인 시대적 배경, 저자에 대한 논쟁, 욥기의 정경 안에서의 위치, 그리고 신학까지 일반적인 접근보다는 조금은 세밀하게 다루어 보려고 노력했다. 더불어 기존의 보수적인 해석적인 틀을 거꾸로 보려고 설교 준비를 하며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지난 주, 드디어 본문 강해의 문을 처음으로 열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1) 1:1절을 해석하면서 교우들에게 나름 긴장하는 마음으로 조금은 당황스럽겠지만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솔직한 입장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욥이라는 인물에 대한 신학자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음을 말이다. 하나는 근본주의적인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실존적인 인물이라는 학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포로기 후반부인 주전 6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 즈음에 최종적으로 편집되었든지 아니면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욥을 가상적인 인물로 보는 조금은 진보적인 학설이 있다고 전했다. 이 학설을 전하며 설교자는 후자 쪽을 지지한다고 표했다.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은 세 가지 정도였다. ① 욥기서의 내증적인 자료에 따른 6:19절에 나오는 ‘데마의 대상과 스바의 행인들’이라는 고유명사화 된 사회학적인 명칭과 3:14-15절에 나오는 ‘왕들과 고관들과 통치자들’이라는 관료적인 명칭은 포로 후기인 바사 시대의 명칭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② 1-2장에 나오는 ‘사탄’은 포로 후기 예언서인 스가랴에 등장하는 사탄의 존재와 유사하고 이 단어는 스가랴 이전 문학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들었다. ③ 결정적으로 설교자가 욥기 서를 포로 이후의 산물이라고 본 이유와 욥을 가상의 인물로 본 이유는 신학적인 측면 때문이었다. 즉 악인의 번영, 의인이 당하는 고난 등등의 개관은 마치 역대기 사가들의 특징인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구심점은 선민의식의 재 회복, 그리고 다윗 언약의 상실이 아니라 현재적인 유효성이라는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편집자는 욥이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그를 통한 고난의 담론들을 회복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쪽으로 기울게 만든 의도성을 나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해석이 자의적인 해석으로 굳어질까 염려되어 구약 선생님께 문의했더니 돌아온 답변이 이러했다. “현대 구약학계의 욥기에 대한 해석적 동향은 명쾌한 소설로 본다.” 이런 친구의 말도 일조했고 콘라트 슈미트의 말이 신학적으로 동의되었기 때문이었다. “발생한 모든 극적인 긴장에서, 그리고 욥이 경험한 모든 냉혹한 타격에서 다음이 분명히 인지될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표본이지 실존 인물이 아니다. 욥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욥은 경험의 묘사로부터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압축하여 형상화된 소설 속의 인물이다. 엘리 비젤이 말한 것을 인용한다면, 욥은 살아있지(gelebt) 않았으나, 매우 고통 받았다.(gelitten)”(콘라트 슈미트, ‘욥의 길’, pp,54-55) 이 내용을 전한지 일주일이 되어간다. ‘욥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이게 말이 되나요?’ 혹시나 하는 후폭풍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들리는 후담들이 대체적으로 이렇다. “우리들이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포로기 이후의 편집적인 산물이라면 충분히 욥기의 내용이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옵니다.” “열심히 욥기 강해를 들어야 하겠네요.” 등등이다. 물론 반대편의 생각을 갖고 있는 성도들이 숨고르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욥기라는 성서의 정경 안에 있는 욥이라는 인물이 가상의 인물이든, 실존의 인물이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욥기의 저자 혹은 편집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의 신학적 해석과 의도 그리고 이런 욥을 왜 정경 안에 들어가게 성령께서 인도하셨는가? 의 해석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맺은 4번째 강해를 전하고 난 뒤에 설교자로서 따뜻한 감동이 임했다.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는 세인 교회 공동체의 강단에 대한 감사, 그리고 약간은 위험스러운 설교의 담론들을 거침없이 듣고 밑줄 그으려는 성도들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감동으로 임했다. 난 내가 섬기는 세인교회가 너무 행복하고 좋다. 목감기가 심해 링거까지 맞고 온 월요일이라 그냥 쉬었으면 좋겠는데 서재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는 남편이 무척이나 못마땅하다고 핍박하는 아내가 있지만 성도들에 대한 감사가 커서 월요일의 목양터 놀이마당에 흔적을 기쁨으로 남겨놓는다. 약기운이 퍼져서 몽롱하지만 그래도 나눌 수 있는 거리가 있어 행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