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픕니다.
2017년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성탄주일이니 한 주간만이 남아 있는 2017년, 세인교회 목사로 한 해를 뒤돌아보면 아픔도 있고, 기쁨도 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기쁨이라고 하면 교회가 나름 교회로서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선방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친구들과의 만남을 가졌을 때, 2017년만큼 교회 사역이 힘든 적이 없었다고 술회하며 볼 멘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17년은 교회의 내외적 상황이 정말로 많이 힘든 한 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인교회는 결산을 해보니 후퇴가 아닌 미미하기는 하지만 진보로 점을 찍었다는 점에서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아픔은 최정희집사의 소천이었습니다. 조금 만 더 우리 곁에 있었으면 했던 자매를 하나님께 보내야 했던 그 쓰라림은 목회자인 저에게는 견디기 참 어려운 아픔이며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희비에 대한 흔적과 기억은 이 또한 지나갈 것이기에 잠시의 감정적인 낙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2017년을 마감하면서 마치 전쟁터에서 폭격을 맞은 것 같은 상흔으로 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목양의 현장에서 교우들과 부대끼며 경험했던 희로애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적 요인입니다. 종교인 세금 납부에 대한 담론이 2017년 막바지에 저를 몹시 힘들게 합니다. 제가 종교인 납세에 대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울고 싶은 것은 정부의 정책 그리고 그 정책에 대한 찬반 입장 표명으로 이해 극단의 대립을 하고 있는 양비론적인 시시비비의 결과에 따른 응대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목사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안(案)이 결정되었기 때문도 아니요, 불리한 양태로 결정 났기 때문도 아닙니다. 종교인 세금 문제에 대하여 울고 싶은 것은 어떤 결론이든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고 져도 진 것이 아닌 교회의 자화상 때문입니다. 민경배 교수가 쓴 ‘한국교회사’ 를 보면 민비 시해사건 때 고종은 그 엄청난 두려움과 극한 공포 속에서 외친 외마디가 ‘밖에 그리스도인 아무도 없느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제 강점기라는 비극 속에 있었던 그 참담한 시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국내외적인 인물들 중에 상당수가 예수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을 역사는 증언합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가장 어렸고 힘들었을 때 교회에서, 기도원에서, 골방에서, 토굴에서,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산상에서 밤을 지새워가며 기도했던 그리고 피를 흘렸던 소수의 순교적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류도 아니었고 대형교회를 밑 배경으로 하고 있는 힘 있는 거대한 공룡도 아니었고 변방에 존재하던 창조적 소수들이었습니다. 많은 다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국가는, 세속의 사람들은 바로 그 그리스도인들을 인정했고, 그들이 섬기는 교회에 무언가를 그리고 바라며 갈망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소통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었고 강제하려는 그 무언가가 존재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행복했던 것은 교회와 국가는 함께 가는 아름다운 관계였다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런 데 종교인 세금 담론 운운이 웬 말이겠습니까? 오늘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국가가, 세상이 교회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향한 기대감은 제로입니다. 아니 더 비극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교회가 너무 불편해졌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에 대하여 강제하기 시작했고, 물리력과 공권력을 동원하려는 시대까지 되었습니다. 그것은 세속적 가치를 붙들고 있는 자들의 당연한 실력 행사요, 압력이 되었습니다. 현직 목사라는 이름으로 사는 자로 냉정하게 성찰하고 비판한다면 세속의 가치가 요구하는 것이 과유불급이 있다는 것을 저 또한 부인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심하게 표현한다면 저 역시 이것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목사로서 가지고 있는 마지막 남은 자존감의 마지노선까지도 무너뜨리라는 세속의 요구를 보며 분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오늘날 교회의 세무사찰, 종교인의 세금 납부라는 단어가 세속의 사람들에게 열광하며 지지하는 상용의 단어가 되게 한 근본의 원인 제공자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와 그 교회 지도자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더 서글픈 것은 앞으로 이 기막힌 상황은 가일층(加一層) 더 할 것이라는 예감입니다. 이 예감이 맞지 않게 하려면 교회의 자정능력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자신이 없어 아픕니다. 그러기에 한 가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주님, 당신의 교회들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