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나와 소위 말하는 ‘멍 때리기’ 대회를 했던 것을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방송을 보면서 아무리 예능이라는 프로그램의 콘셉이지만 조금 심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생각을 한지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근래 내가 ‘멍 때리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니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상념이 강하게 밀려옵니다.
목회를 하면서 아주 가끔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그냥 멍 때리는 시간을 보내고 오면 참 정신 건강에 좋겠다는 소회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갖은 상념 때문입니다. 잠자리에 들어 이리저리 뒤척일 때 공통점은 내일의 목회를 생각할 때입니다. 내일의 목회가 완벽해야 하는 데 미리 걱정하는 쓸데없음이 밀려오면 영락없이 잠을 설칩니다. 결론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닌데 내가 하려고 했다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괴감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30년을 살아온 것을 보면 차라리 병적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이제야 멍 때리기를 동경하겠는가 싶습니다. 여류작가이자 문학비평가인 레베카 솔닛이 쓴 걸작인 ‘남자는 자꾸만 나를 가르치려 한다.’는 금년도 제 독서 보고의 보물 중 톱 랭킹에 올라와 있는 책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이런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길 잃기’는 때론 개인의 정체성이 부여하는 유대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공간이다.” (P,139) 순간 눈이 번쩍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어 말한 부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의 ‘길 잃기’는 말 그대로 길을 못 찾는다는 의미에서의 길 잃기가 아니라 미지에 대하여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의 길 잃기이다.”(솔닛의 같은 페이지) 글을 접하다가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언제 길을 잃지? 두 가지 중에 하나 일 것 같았습니다.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그 길을 지나쳤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집중을 했는데도 익숙하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자답이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는 길에 대한 완벽한 청사진을 걸어놓고 성공하기 위해 거기에 걸 맞는 프로그램과 스케줄대로 전투적인 삶을 살 때가 거의 모두의 공통점입니다. 그 성공의 삶에 빈틈은 허락되지 않는 암적인 요소이고, 격파의 대상이며 물리침의 대상으로 보고 그 빈틈을 메꾸려고 악다구니를 씁니다. 레베카 솔닛의 글을 읽다가 드라마틱한 반전일 수 있겠지만 인생의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뒤로 한 발 물러서는 것이 참 중요한 일임을 배웠습니다. 물러섬은 길 잃기입니다. 길을 잃어봐야 미지에 대한 새로운 조망이 내 시야에 들어오기에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떤 경우 나와 너에게 ‘멍 때리기’의 여유로움은 공부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교회도 한 발 물러섰으면 좋겠습니다. 신자인 나도 너도 한 발 물러섰으면 좋겠습니다. 물러서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길 잃기를 경험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승려 혜민을 두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멈추면 보인다.’ 는 그의 말이 살갑게 다가오기에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