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말까?
옛날 신학교 시절, 은사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제군들이여! 신자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신학교 시절, 교수님의 이야기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말이었지만 현장에서 목회를 하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이 가르침을 받고 현장에 나와서 사역한지도 3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겨보니 당시 은사님이 하셨던 말씀 둘 중에서 전자는 맞는 말이지만 후자는 틀린 말 같다는 역전전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궁금하시지요?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신자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전자의 말을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신자들이 못됐다는 차원의 부정적인 의미가 결코 아님을 목양의 현장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이 말의 진의(眞意)는 목회의 연륜이 쌓으면서 배운 교훈인데, 그렇게 사역을 해야 한 교우와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황금률이었습니다. 이 교훈은 매년 마다 배우는 알토란같은 지혜입니다. 반면 정말로 맞는 말 같은 후자의 가르침은 해마다 사역의 두께가 쌓이면서 도리어 틀린 말처럼 다가오는 무게감 때문에 분명히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자는 사랑의 대상이다.” 결코 틀리지 않은 말인데 그렇게 사랑한 사람을 전혀 뜻하지 않게 잃게 될 때 근본적인 신뢰가 흔들리는 것 같은 아픔과 상처가 목사에게 고스란히 남습니다. 더불어 그 상처는 생각보다 너무 오래가기에 목사의 심장을 도려낸 상흔이 너무 진하게 자리매김하여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까지 합니다. 지난 주간에 사랑한 지체를 하나님께 보내드렸습니다. 고급 진 표현입니다. 그러나 매몰차게 이야기하면 목사는 팔 한쪽이 잘려나간 아픔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2개월 전 즈음, 새벽에 예배를 인도하고 난 뒤에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에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소름 끼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계획을 네 소원으로 꺾으려하지 말라” 고 최정희 집사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에 들은 세미한 소리였기에 제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찬물을 끼얹으시는 주님의 조명이었습니다. 순간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꺾지 말라는 세미한 음성에 대해 대단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면을 통해 처음으로 밝히지만 하나님께 이후에 끊임없이 대들었습니다. “이게 제 정욕의 기도입니까? 이 기도가 주님께 그렇게도 합당하지 않은 기도입니까? 그래요, 주님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두고 봅시다.” 그 무모하고 불손한 태도로 말이지요. 지나고 보니 참 못났지요? 저도 압니다. 왜 제가 하나님께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아니, 왜 제가 하나님의 계획이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보다 분명히 더 완벽하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냥 그 때는 그렇게 떼쓰고 싶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목사의 신앙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한심하다고 공격해도 그냥 그러고 싶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들어온 날, 제 고통을 아파하던 지체 한 분이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오늘 많이 힘드셨죠?” 이렇게 그 지체에게 답변을 보내드렸습니다. “헤어짐과 장례를 생각하고 성도를 미워하며 목회할 수도 없고, 너무 사랑하면 이렇게 아프고 정말로 그러네요.” 그러니 신자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은사 교수님의 가르침도 가볍게 아멘 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래저래 목회는 죽을 맛입니다. ㅠㅠ.
그래도 정신을 차려봅니다. 그리고 다시 두 손 모아봅니다. 고 최정희 집사의 영원한 쉼의 간절히 소망을 위해. 무척, 사랑한 자매였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