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의 글에 엄지척을 날린다. 창립 8주년 기념주일 설교 텍스트를 무엇으로 할까를 놓고 치열하게 하나님과 씨름하는 어간, 가장 거북한(?) 본문인 예레미야 7장을 택했다. 거북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예레미야에 의해서 선포된 이른바 ‘성전설교’의 메시지는 축제의 날에 찬물을 끼얹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우들에게 예레미야 7장을 본문으로 성전 설교에 대한 세밀한 주석을 거쳐 목사의 개인적 해석을 내놓으려고 노력한 끝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나누며 섬기는 교회의 향후 9년차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뒤돌아보니 창립주일 선포된 ‘성전설교’ 원고 작성에 일등공신은 세 개의 책이었다. 김근주 교수의 ‘예레미야 특강’(IVP,2013년 간)과 김기석 목사의 ‘끙끙 앓는 하나님’(꽃자리, 2017년 간), 그리고 차준희 교수의 ‘예레미야 다시보기’(프리칭 아카데미, 2009년 간)였다. 본문은 예레미야 7장을 택했지만, 주석(註釋)을 할 때 같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예레미야 26장과 동시에 36장이 기록한 여호야김이 영적으로 와해되어 있는 상태를 고발한 결정적 성경적 내증을 3D로 보는 듯한 입체적 설명을 통해 성전 설교의 무게감을 교우들과 함께 심도 있게 나누며 오늘,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공동체가 9년 차, 10년 차의 행보를 어떻게 걸어 나아가야 하는지의 의미를 찾아내는 중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식이 일천(日淺)하여 예언자 예레미야 사역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 설교’를 주석하기 위해 위에 전술한 세 사람이 저술한 책들을 참고하면서 개인적으로 설교 준비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도움 외에 받은 생각지 않은 지적 보너스가 있었다. 소위 지칭되는 ‘성전 설교’를 해석한 세 명의 진술들을 접하면서 한편으로 안도하게 하는 공통의 이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 같지만 신앙적 기상도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 저들의 ‘해석’ (INTERPRETATION)을 찾으면서 참 좋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지론은 물론 전적인 개인적 정의이기에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전제하지만 세 사람의 ‘성전설교’ 해석은 아주 예민한 차이를 보였다. 제일 먼저 눈에 띠었던 대단히 진보적인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김근주 교수의 ‘성전설교’의 키워드는 아니나 다를까 여호야김 4년(주전 608년)에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재물과 권력을 축첩하고 있는 가증한 성전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맹공으로 귀결되었다. 하나님의 미슈파트와 체다카의 실천인 고아와 과부와 객과 이방인들을 향한 돌봄과 사랑을 완전히 잃어버린 성전 종교는 와해되어야 할 대상이고, 제거되어 마땅할 존재라고 일갈하는데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심각한 것은 오늘 우리들이 섬기는 한국교회가 여호야김 시대의 성전 종교의 일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범죄 집단과도 같음을 김 교수는 맹비난했다. 그리고 이렇게 망가진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거나 회복될 가능성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점수를 매기고 있다는 점에서 내내 아픔으로 그의 해석에 천착했다. 두 번째 접한 김기석 목사의 ‘성전 설교’에 대한 주석과 해석은 전술한 김근주 교수가 목회현장에 있지 않은 신학자인데 비해, 김 목사 스스로가 현장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상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에 대한 과격한 행보와는 달리 숨고르기를 하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 목사 역시, 진보적인 성향의 목회자이기에 오늘날 만연된 외형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예레미야가 선포한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7:4)는 서슬이 시퍼런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할 당사자 대상으로 정의했다는 점은 역시 상당수의 보편적 성향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방점을 찍었지만 왠지 김근주교수의 갈파에 비해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주었다고나 할까 싶었다. 그런데도 어쩌랴! 상당수, 김 목사의 ‘성전 설교’ 에 대한 날카로운 메시지에 나 또한 공감되니 말이다. 세 번째, 참고한 것은 차준희 교수가 나름 역작으로 펴낸 ‘예레미야 다시보기’이다. 차 교수의 예레미야 7장 ‘성전 설교’의 분석을 읽다가 이런 소회가 있었다. 너무 불편한 진실인 예레미야 7장의 주석과 해석은 평범한 한국교회의 목사들에게 적어도 7장을 다루어야 할 때 가장 온화하게 해석한 참고자료이겠다 싶은 느낌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차 교수의 ‘성전 설교’에 대한 예레미야 7장에 대한 ‘주석(exegesis)’이나 ‘해석’(interpretation)’이 가벼울 것이라는 선입관 말이다. 그의 해석은 탁월한 지적 분석과 만족도를 준다. 난 개인적으로 복음주의 권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라서 그런지 설교 준비를 하는데 그의 주석적 자료로 인해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만 차 교수의 글이 앞에 언급한 두 책들에 비해 훨씬 더 온건하다는 점에 있어서 오늘날 교회가 보이고 있는 성전 종교적인 일탈들에 대하여 날카롭지 못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는 오해의 소지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아주 급진적인 학자의 해석, 진보적 성향의 목회자의 해석, 그리고 중도의 입장에서 나름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 신학교수의 ‘성전 설교’ 자료들을 옆에 펼쳐 놓고 설교 준비라는 명목 하에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다만 세 사람의 책에서 같은 공통분모로 아파하는 성전종교와 되어 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경종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비수가 되어 날아와 많이 아프고 지금도 아프다. 섬기는 교회가 공부를 하게 해준 세 사람의 고언처럼 미슈파트와 체다카를 실천해 나아가는 제천 지역의 보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엄지척을 좋아하는 제천 세인 교회 이강덕 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