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모세의 기도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시편 90:10절의 구절입니다. 이 시를 모세가 기록했다는 데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어서 저자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저자가 모세이든, 아니면 바벨론 포로시기에 모세의 정신을 이어가고 싶어 하던 한 지성인의 고백이든 상관없이 이 시의 내면에 담겨 있는 신학의 언어가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이라는 쌍두마차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동소이할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연수가 평상으로는 칠십, 강하면 팔십이라는 말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됩니다. 2주 상관으로 두 어르신의 장례를 모셨습니다. 한 분은 92세의 일기로 소천하신 장수남 어르신, 또 한 분은 90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변순예 어르신입니다. 두 분 어르신은 동일하게 성경의 연수를 훨씬 뛰어넘는 삶을 향유하셨습니다. 90세를 넘겼다는 점에서 장수의 복을 받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두 분을 뵈었을 때, 저는 장수의 복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배움을 곱씹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노환(老患)으로 인해 몹시 힘들어들 하셨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다 소진하여 산소 호흡기를 떼면 금방이라도 호흡을 멈추는 상황인데도, 자식들은 인륜 때문에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기계를 떼라고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에 어르신들은 더 힘든 생명의 연장을 거듭해야 하는 고통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천 노인 병동에 변순예 어르신을 임종 차 방문했을 때, 그 병동 안에 입원해 계신 참 많은 어르신들을 보았습니다. 법적인 수용소와 같은 바로 그곳에서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고 계신 많은 노인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시편 90편의 모세의 기도가 스쳐지나갔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후반절이 더욱 진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지난 주간 소그룹 저녁 반 사역을 하는 중에 지체 중 한 교우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구십까지 살까봐 걱정이에요.” 어버이 주일과 어린이 주일을 겸하여 지키는 가정주일 아침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던 생각이 거기에만 그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고루하지만 깊이 했습니다. 왜? 더 중요하게 고민하며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입니다. 가끔 교우 중에 기도하는 소리가 새벽에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 교우의 간절한 기도 내용 중에 하나는 ‘소천(召天)의 복을 주옵소서!’입니다. 이재철 목사의 책에서 본인이 섬기던 교회에 권사께서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자가 호흡을 하지 못할 때, 결코 기계를 입에 대지 말거라.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슬퍼하지 말거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맞추어 가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가슴 찡하는 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분의 어르신을 하나님 나라에 보내드리는 경험을 하면서 가시 한 번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소천의 아름다운 복을 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