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내와 취미인 목욕을 다녀오다가 길가에 핀 노란 자태를 뽐내고 있는 꽃을 보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와! 개나리가 이제 피기 시작했네.” 아내가 저의 말을 듣고 핀잔을 주며 웃었습니다. “저건, 개나리가 아니라 산수유예요. 산수유!” 졸지에 자존심에 금갔습니다. 수요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사택에 올라와 앵커 브리핑을 기다리며 잠시 화면에 집중하는데 탐스럽게 남도에 핀 벚꽃이 화면에 나타나 반가운 나머지 월요일의 망신살을 새카맣게 잊고 또 한 마디를 했습니다. “벚꽃의 계절이 이제 시작이네.” 제 말을 듣고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아내가 이제는 박장대소하며 저에게 툭 돌직구를 던졌습니다. “꽃잎이 하야면 당신은 다 벚꽃처럼 보이지. 저건 벚꽃이 아니라 매화라는 거예요. 매화” 그날 절망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절대로 ‘잘난 체 하지 않으리라’ ‘모르면 입 다물리라.’ 하기야 몇 년 전, 교회 뒤뜰 정원을 교우들과 돌보는 중에 ‘민들레’를 보고 ‘강아지풀’이라고 말했다가 권사님 한 분한테 치도곤을 당한 일이 그리 멀지 않은데 또 가장 취약한 꽃 이름을 운운했으니 망신당해도 싼 일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대도시에서 태어나지 말고 깡 촌에서 태어날 걸 그랬나 봅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식물도감을 옆에 차고 열심히 다시 방과 후 하는 나머지 학습을 하든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도의 성자로 추앙받는 간디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두 가지의 질 나쁜 죄가 있다는. ① 모르고도 배우지 않는 죄 ② 알고도 가르치지 않는 죄. 간디의 이 말을 곱씹고 참 힘들었던 시절, 조국을 위해 더 놀라운 사유함으로 동포들에게 고했던 함석헌 옹의 말이 이미 제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배웠으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 전적으로 옹(翁)의 말을 공감하고 지지하면서 오늘 저와 같은 목사들이 부심하고 또 부심해야 하는 항목이 무엇일까를 곱씹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도달하는 결론은 저의 철저한 개인적 소견이지만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으려는 것’이 아닐까에 방점을 찍는 편입니다. 모르는 것은 약간의 창피함을 동반하지만 그건 결코 비난받을 만한 중죄가 아닌데도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에 저를 비롯한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유감입니다. 도리어 모르는 것을 아는 체 함으로 인해 더 걷잡을 수 없는 곤란에 빠지는 것을 허다하게 경험하고 보는데도 마침 그 일이 닥치면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의 무지에 대한 방어 때문에 과유불급의 더 거짓된 것으로 항변하다가 더 깊은 상처를 받는 것이 아프고 또 아픕니다. 오늘의 누구처럼. 몇 년 전에, 중세 영성신학자라고 명명해도 조금의 손색이 없는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한 설교를 편집한 성공회 사제인 매튜 폭스의 책을 접하면서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는 동안, 나는 텅 빔과 독거와 광야에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매튜 폭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p,366.) 나는 당시 이 글을 읽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왜? ‘텅 빔, 독거, 광야’라는 익숙하지 않음과 모름에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다는 존재의 실체를 인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시기에 더 깊은 앎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백이 있는 자라고 말하는 엑카르트의 갈파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로 살면서 이 결단은 그래서 현재진행형입니다. “모르면 입 다물고 있다가, 공부한 뒤에 말하면 됩니다.” 모르면 공부하면 됩니다. 아, 그래도 사족은 하나 남깁니다. “왜 꽃은 비슷한 게 그렇게 많죠? 후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