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재미가 없다. 나 같은 목사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읽으면 도대체 한글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전문 용어, 종교적인 언어, 거기에다가 번역서라는 한계 때문에 오는 이질감까지 진짜로 재미가 없는 책이다. 지난 해 송구영신예배시간에 교우들에게 신년 교례를 할 때, 항상 하던 큰절을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차준희 교수가 세배 잘 받았다는 댓글을 달아준 것을 보고 세뱃돈을 요구했다. 세뱃돈은 친구가 불과 얼마 전에 번역한 현존하는 구약교수 중에 상당한 석학인 월터 브루그만이 쓴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부제: 핵심 가이드)를 보내주는 것으로 잠정 합의했는데 지난 주, 책이 도착했다. 적어도 친구가 보내준 책들은 왠지 모르게 의무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가능하면 서평도 남겨야 한다는 압력까지 몰려와서 역시 예의상 목욕탕에 가지고 가 단숨에 친구의 노력을 만나게 되었다. 독서 이후의 소회는 전술한 대로다. 무척 재미없다. (상업적 관점) 물론 개인적으로 나는 책 안에 담긴 귀한 내용 들 중에 특히 구약예배의 속성 중에 몸짓으로 드리는 예배 행위가 의미하는 신학적 팩트의 신선함에 놀랬다. 저자가 일곱 가지로 열거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와 하나님 사이의 예배 안에서 드러나는 묘한 긴장관계를 존재하는 틈새(play)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기막힌 갈파를 보면서 그의 뛰어난 신학적 성찰과 혜안을 공부의 노력으로 얻는 기쁨을 누렸지만 일반 독자들이 만에 하나, 이 내용을 접했다면 무척이나 재미없는 일일 것이 분명하다. 친구가 수고로이 번역한 번역서에 초를 뿌리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신학생 독자들이나, 굳이 거론하자면 번역자의 지인들이나 어쩌다가 읽을 이 책을 번역자는 시간의 수고를 들여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이후, SNS 공간에서 번역자도 이 일을 알기에 기독교 출판 서적이 얼마나 고사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논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무모함을 속 깊게 내비친 글을 보면서 한편으로 애처로웠지만 그래도 친구인지라 그의 무모한 수고에 먼저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게 계산하지 않는 그리고 유, 불리에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학자의 자세인 듯싶어서이다. 저자가 제시한 본 책에 담긴 고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지체들 사이에 일어난 예배라는 역동에 담긴 수많은 혜제(惠題)들이 번역자의 수고로 인해 우리들 손 안에 들어왔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재미없는 책이지만 많은 독자들이 번역자가 무슨 의도로 이 책을 번역했는지의 진정성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지만 현실은 분명히 냉정할 것 같다. 5개월 전, 나름 최선을 다해 첫 번째 책을 출간했다. 어디에서 그런 교만이 충만했는지 이 책을 많은 독자들이 읽어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ㅎㅎ) 번역자인 친구의 번역서를 보면서 땀 흘리고 학자로서의 자존감을 갖고 노력했을 것이 눈에 선했다. 재미없는 책, 독서의 내공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인 책, 한글로 쓰여 있지만 도대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을 한국 신학계를 위해 몸 사른 친구에게 그래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 정도는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오늘 우리 교회 지체들에게 실없는 친구의 노력을 글로 칭찬해 본다. 마음 같아서야 친구를 위해 교우들에게 강매(?)를 권하고 싶지만 담임목사 어려운 설교를 듣기에도 치쳐 있는 교우들에게 친구의 책을 소개해서 머리에 쥐나게 할 용기가 도무지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한 마디는 남긴다. 준희야, 진짜로 수고했다. 이렇게 불리할 때 항상 쓰는 목사들만의 도피처가 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