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대중가수 김광석 씨가 부른 노래 중에 ‘어느 육십 대 부부의 사랑 이야기’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랫말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새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딸 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이 노래를 우연히 맨 처음 들었을 때 듣고 있자니 이제 나이가 이 노래를 의미 있게 들어야 할 나이가 서서히 되고 있어서 그런지 눈 주위가 충혈 되어 옴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가사에 감정이입 되었던 인간의 본능적 기질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눈물은 아마도 단회적으로 흘리는 눈물일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아내가 셀 사역을 다녀와서 저에게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전언해 주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권숙진 집사의 둘째가 충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지난 성탄주간, 엄마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있었던 축하의 밤과 성탄절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경험한 소회를 진솔하게 나누면서 눈물을 두 번이나 흘려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성탄 축하의 밤에 어우러진 우리 교회 장년, 청년, 학생, 주일학교 어린이들 전부의 영적인 어울림을 보면서 한 번, 새벽송을 통해 드려진 구제 연보를 관내 있는 소녀들 중에 너무 비싼 생리대 가격 탓에 구입하지 못해 너무나 아픈 경험을 여성이 되는 첫 관문부터 느껴야 하는 딸들을 위해 지원하기로 한 광고를 들으면서 또 한 번이었습니다. 양진의 경험을 아내를 통해 들으면서 종 역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저 역시 눈시울 뜨거워진 이유가 그것은 아마도 눈물의 잠식(蠶食)이라는 괴물에게 공격받아 잊고 살았던 감동의 눈물을 예기치 않게 양진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일깨움 받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016년을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 오늘, 이런 생각에 젖어보았습니다. 시대의 비극이 무엇일까? 의 감회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감동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로 귀착됩니다. 아무리 감동적인 일들이 밀려와도 무감각한 세태, 누군가의 헌신으로 인해 움직이는 공동체임에도 그 누군가의 헌신에 진정성 있는 감사를 모르는 세태, 도리어 수많은 질타와 비난과 채찍이 난무한 세태가 오늘의 메마르고 건조한 눈물을 상실하게 한 원흉들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책과 함께 하면서 훌쩍일 때가 많습니다. 저자가 전해준 감동 때문입니다. 성도들과 전화를 하다가 울 때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아픔을 전해 들으면서도 아주 가끔은 목회자로서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이 그냥 울음이라도 같이 울어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를 성경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펑펑 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조명해 주신 이 감동의 메시지를 과연 나 같은 자가 이 말씀을 전해야 하는 두려움과 또 다른 한편으로 맡겨주신 은혜의 백골난망 때문입니다. 또 어떤 때는 전한 말씀으로 인해 성도들이 아주 작지만 주님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울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 때는 섬기던 교회에서 울보 목사라는 별명까지 생겼던 추억이 있습니다. 이제는 아득한 것 같은 그 별명이 제 별명이었다는 것을 추억하면 실소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2017년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작은 소망을 추슬러 봅니다.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정말로 쉽지 않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잃은 눈물을 찾아볼까 합니다. 목사가 눈물이 말라서야 성도가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어록이 크게 공명되어 들립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누가복음 2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