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전이다. 한 해의 시작이어서 그런가. 한 주간, 치열하게 보냈다. 이제 주간 틀을 만든 설교를 원고화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가만히 보니 또 한 해 설교라는 거대한 담을 또 넘어야 고독한 투쟁인 듯하다. 첫 번째 주, 할당된 독서 몫은 다분히 고의적으로 팀 켈러의 '설교'와 존 스토트의 '설교'로 정했다. 현직 목사로 살아내야 할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짐(BURDEN)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허먼 멜빌이 쓴 ‘모비딕’에 나오는 설교에서 설교자는 뱃머리 모양의 강단에 서는 데 멜빌은 이 모양이 어울린다고 여깁니다. ‘강단은 세상을 이끌기’ 때문입니다.”(존 스토트 ‘설교’ P,217.) “설교에는 모종의 긴장감이 있어서, 다음에 나올 내용을 듣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 일으켜야 하고,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는 느낌을 자아낼 수 있어야 한다.” (팀 켈러의 ‘설교’ PP,299-300) 두 거인은 그냥 평범하게 말한 상식의 교훈이겠지만, 나 같은 범인(凡人)에게는 옥죄는 멍에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스스로 자위한다. ‘치열함’ 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서이다. 아직은 이 치열함이라는 단어가 나를 흥분하게 한다. 어느 날 이 치열함이라는 단어에 무감각해지는 때가 오면 정말로 그때는 끝이지 않겠는가 싶다. 설교를 하는 목사가 설교라는 짐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고, 자신만만해 하는 날이 오면 그때야 말로 목사로서의 생명력이 끝나는 것이 분명하다. 팀 켈러의 글을 읽다가, 존 스토트의 글을 접하다가 뭔가 아직은 내 심장 깊은 곳에서 두 거인들이 말하고 있는 이 선언들이 나를 흥분하게 하는 것은 꼭 나에게 부정적인 것으로만 다가오지 않고 두 거인들이 먼저 걸어갔고 또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 그 길에 나도 동행해 보겠다는 의지의 결단으로 비쳐지는 긍정의 효과도 있다. 언젠가 지구촌교회 원로 목사인 이동원 목사께서 쓰신 그 가운데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스물넷에 사망, 칠십에 묻힘.” 순간,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분명하다. 이 사람은 분명 비극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힌 것은 70세였지만, 꿈과 비전을 잃어버려 실질적인 사망에 이른 것은 24세였다는 교훈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치열함이라는 말은 몸부림, 바장임, 움직임에서 아직은 살아 있다는 방증이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사람이 치열함을 잃어버린다면 가장 슬픈 죽음을 이미 경험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표현이라고 나는 믿는다. 앞서 언급한 존 스토트 목사의 책 원제가 ‘나는 설교를 믿는다.(I believe in Preaching)’이었다고 한다. 전율하는 도전을 받는다. 본인이 전하는 설교에 얼마나 큰 자존감과 자부심이 있으면 이렇게 선언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스스로 존 스토트 목사가 말한 내용을 교만함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선언을 도전과 진정성이 있는 교훈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가 살아생전의 살아냈던 삶의 치열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설교를 만들어내려고 했던 영성, 조금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려했던 올곧은 복음주의적 고집, 그리고 삶으로 본이 되었던 그의 족적들이 나로 하여금 그의 치열함을 인정하게 만든 요소들로 작용했다. 2017년, 목사로서 더 치열한 삶을 살아내야 할 이유를 팀 켈러와 존 스토트가 저에게 먼저 시연해 준 것 같은 은혜를 지난 한 주간 받았다. 세인지체들이여, 치열하자. 무뎌지지 말자. 그래야 하나님의 식을 살아내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