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해지지 않기 위하여 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맨부커 상 수상을 해서 일약 스타덤에 오는 작가 한강이 근래에 쓴 ‘흰’이라는 아주 짧은 단편을 한 달 전 즈음에 만났습니다. 작가의 글 말 중에 초승달을 보고 ‘창백한 달’이라고 표현한 대목을 만나면서 참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야위고 야윈 달을 보면서 그 달의 이미지를 ‘창백한 달’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한강의 사유함이 무척이나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작고한 박경리 선생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후배 소설가인 박범신에 대한 단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에서/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어머니!/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아아/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두 사람의 느낌을 잔잔히 적은 박경리 선생의 이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왜일까요? 진한 동의의 표현이지 않았겠습니까? 두 사람이 느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내공들을 저 또한 100% 공감하고 큰 공명으로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이유는 사유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천박해지는 이유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오감에 흡족한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근래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암세포보다 더 무서운 치명적인 독소는 생각하지 않고 살게 하는 무감각들입니다. 지난주간에 발표된 삼성 휴대폰 최신 기종 발표를 보면서, 또 이 삼성 브랜드와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애플의 최신 아이폰 발표 역시 안 보아도 비디오인 공통분모가 눈에 보입니다. 목사라는 직업의식이 갖고 있는 결벽증이라고 반격하면 어쩔 수는 없겠지만 최고와 첨단을 달리고 있는 기기들의 최대의 장점들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더욱 사유하게 하지 않게 하는 편리함을 제공해 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주 민감하게 세포의 감각적 터치로 조그마한 화면에 신세계가 열리게 하고, 이제는 인간의 홍채를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하는 정도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인간이 왜 생각해야 하는가? 인간이 왜 이런 편리한 세상에 사유해야 하는가? 를 강하게 따지는 기상도에서 생각하기를 사아유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입지는 더 더욱 좁아지고 있어 서글퍼지기 까지 합니다. 분명히 이대로 가면 인간은 컴퓨토피아의 세계에서 노예로 전락할 것이 너무도 자명한데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 시대가 저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끔찍합니다. 지난 주간, 담임목사의 책 출간 출판사가 결정되었습니다. 출판사를 경영하는 장로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 중에 저에게 이런 질문을 그분이 하셨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런 다양한 책들을 접하시게 되었습니까? 목사로서 흔치 않은 일이라서” 질문을 받고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목사가 생각하는 사유하는 사람인 것을 나누고 싶었고, 천박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세인들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천박해지기를 종용하는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천박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사유함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유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