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정말로 내 불의한 삶을 살게 하는 직장을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져 주십니까? 이 직장은 내 생존의 터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이 목사께서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다고 확언하자 젊은이는 그 직장에 과감히 사표를 쓰고 하나님께 자기의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것에 승부를 걸었고, 결국 하나님은 초기에 그 젊은 집사를 연봉의 차원에서 보면 턱없이 부족한 길로 인도하셨지만 이후 신앙의 갈등이 없는 아름다운 삶을 살면서 그의 삶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영적 성숙의 자리로 완벽하게 책임지셨음을 책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의 신실한 집사님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내용인 즉은 금년에 시행되는 김영란 법으로 인하여 상당수 많은 영역에서 소비의 대한 경계심 때문에 적지 않은 곤란함을 겪고 있는 데, 여 집사님의 직장과 관련된 직종도 매일반이었던 같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직장 상부에서 각 직원들에게 본인이 관련된 직종의 물품들을 선물하는 것은 예외로 하는 법을 발의하기 위한 서명 운동지를 받아올 것을 할당했고, 그 결과 말단 직원들은 또 예기치 않은 이른바 직장의 갑들에 의해 질을 당해야하는 속상함이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집사님은 이 방법이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알고 더군다나 신앙인의 양심으로 이일에 도무지 굴복할 수 없어 거부했지만 답답한 나머지 의견을 개진한 것입니다. 물론, 이 방법이 틀렸음을 알려드렸고 이제는 그 일의 대한 향후 결정은 그 집사님의 일로 결정될 것이며 하나님은 가장 올바른 지혜를 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의 바른 삶은 시간이 갈수록 더 녹록하지 않은 시대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에 따라 세속적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또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아주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뭐 그리 별나게 예수를 믿는가? 라고 타박하는 자들까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 틀의 담론들을 너무 쉽게 무너뜨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교회와 목사가 이제까지 암묵적으로 묵인해 왔습니다. 결과, 세상은 교회도 별 다르지 않은 집단으로 매도했고, 이제는 교회가 무슨 올바른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이 땅의 괴물들을 교회가 생산해 낸 꼴이 되었습니다.
이제 고인이 된 신영복 선생이 생전에 남긴 귀한 고언이 더욱 크게 공명되어 들리는 것이 나만의 객기가 아니기를 기대해 봅니다.
“지남철의 여읜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지식인의 초상이다. 어느 한 쪽에 고정되면 이미 지남철이 아니며 참다운 지식인이 못됩니다.”
(신영복의 담론 p.403에서)
저는 이 ‘지식인’ 이라는 단어에 ‘신앙인’이리는 단어를 대치하고 싶습니다.
담임목사는 전화를 걸어 아픔을 토로한 집사님은 물론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가 세속적 가치와 불의에 고정되지 않기를 바라며 항상 정의와 공의를 향하여 움직이는 영적 지남철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