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의 창시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상실수업’ 이라는 책에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죽음은 단지 이 생애를 마감하고 고통과 번뇌가 사라진 곳으로 나를 옮겨가는 일일뿐이에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 정도의 감정과 이성을 견지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WELL-DYING을 잘 준비하거나 훈련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삶을 살면서 부끄럽지 않게 산 사람이든지 일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황석주 집사님의 아버님이신 황봉희 권사님께서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호상을 당한 집사님을 위로하고 문상하기 위해 부여 장지를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유족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헌데 분위기가 장례식장 분위기가 아니라 아주 편안한 상태였기에 아버님을 잃은 애도의 감정보다는 도리어 기쁨(?)이 느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뒤늦게 휴가지에서 급거 돌아온 손녀들의 잠시 동안의 곡만 없었다면 전혀 초상집 같지 않은 분명한 정황이었습니다.
89세라는 연수를 사신 장수하심, 원래는 약간의 치매증상과 노환증세 인해 노인 병원에서 기거하신 상태였는데 생신을 맞이하셨기에 잠시 댁으로 모신 상태였기에 외지에 떨어져 있는 자식들을 다 보시고 효도를 받으심, 집으로 오셨기에 맞이한 주일에 오랜만에 섬기는 교회에 나가셔서 교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시고 교제하심 등등의 정황은 정말로 드라마 같았습니다. 집에서 잠시 계시는 동안, 아침 식사까지 맛있게 하사고 부지런함 때문에 오후에 들에서 소일 끝에 소각할 잡동사니를 태우시던 어간, 약간의 번져나가는 불을 잡으시려다 실족하셔서 의식을 잃으신 끝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일련의 일들을 황 집사님을 통해 들으면서 이런 호상이 또 어디에 있나 싶어 무척 감사했습니다.
슬하의 자녀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들로 인침 받아 있는 각기 처소에게 섬기는 교회의 기둥들로 쓰임 받고 있는 것도 어르신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삶의 결과이고, 사랑하는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먼저 하나님께 부름 받으신 것도 개인적으로 저는 복 중의 복이라고 생각하기에 위로 예배를 인도하면서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영적 희열감을 갖고 어르신을 하나님 나라에 파송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근래, 건강식품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방송을 어쩌다 시청하다보면 모두가 몸에 좋은 식품들이 방송국마다 소개되는 기현상을 봅니다. 심지어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두뇌들은 몇 년 안에 암 정복은 물론, 인간 평균 수명 120-140세 시대를 열 수 있다는 여기저기의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기까지 하며 흥분합니다. 그러나 목사인 저는 그런 와중에 혹시 잊고 사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에난(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들이라는 인식 말입니다. 지혜는 어떻게 오래 사느냐? 보다 어떻게 아름답게 하나님 앞에 서느냐를 준비하는 것이고 그것에 더 천착하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몇 주 전, 교단에서 너무 잘 나가던 신학교 선배께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언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부활주일에. 물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께서 선배를 부르신 분명한 의도가 있겠지만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그리고 하루를 삶으로 죽음이라는 그 날에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 인생인 것을 알기에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 앞에서 잘 설 것인가를 준비하는 WELL-DYING의 목표를 잊지 않고 설정하며 살아가는 지혜는 오늘 우리들에게 너무 필요한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셔서 주님이 오시는 그 날, 다시 부활하실 황권사님을 축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입성을 축하드립니다. WELL-DYING 준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