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의 사제이자 언론학자인 존 컬킨이 ‘마샬 맥루한에게 드리는 신학자의 지침’이라는 아티클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도구를 만들고, 그 후에 도구는 우리를 만든다.” 컬킨 신부가 이렇게 말한 것이 1967년의 일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소름이 끼칩니다. 49년이 지난 오늘, 그의 예언이 너무나도 적확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중간,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또 한 번 미래에 일어날 인간에게 닥칠 비극을 알려준 적이 있지만 컬킨의 예측은 비수가 되어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니 더 더욱 섬뜩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컬킨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의 멘토였던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먼저 통찰했던 지성적 예리함에 대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맥루한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우리의 도구는 이 도구가 그 기능을 증폭시키는 우리의 신체의 어떤 부분이라도 결국 마비시키게 된다.” 오래 전에 맥루한의 이 글을 읽다가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렇게 느슨하게 생각한 나의 서투름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지난 주 여지없이 경험했습니다. 알파고의 등장! 여론도 그렇게 몰고 갔지만 저는 지난 주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전의 결과를 보면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맥루한의 통찰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기분이 조금 그래요. 왠지 슬프기까지 해요.” 어디 이런 기분이 아내만의 소회이겠습니까? 인간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이들 모두의 웃픈 감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으로 만들어낸 최고의 인공지능 게임머 알파고가 보란 듯이 그 인간을 마비시키는 일이 백주에 벌어진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인간의 이기(利器)인지, 아니면 해기(害器기)인지도 아직 분명하게 선을 긋지 못하고 있는 다양한 첨단의 기기(텔레비전, 핸드폰, 테블릿 pc, 노트북 등등)들에게 서서히 농락당하여 인간의 자리를 빼앗기는 소위 말하는 아웃소싱을 당하면서도 마냥 태평하게 그래도 아무런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무감각으로 인해 스스로 자위하는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허나 알파고의 위력을 보면서 살 떨리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이제 얼마 후면 그들에게 농락의 차원이 아닌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하박국 예언자의 예언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던 구절이 있었습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하박국 1:18-19) 물론 예언자 하박국이 경고한 이 우상의 대상을 컴퓨터라고 지칭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컴퓨토피아의 시대를 갈망하며 혹시 구원의 주체를 컴퓨터로 인정하는 자들의 시대가 도래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깊이 고민한 적이 있었고 또 그 고민이 현재진행 중이라는 것에 또 다른 위기감이 저에게는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파고의 맹위는 기실,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점으로 말입니다. 성경도, 이전의 깨어 있는 지성적 선배들도 이미 경고하고 있었던 일이라고. 그렇지만 그 경고가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두렵고 또 두려운 것은 저만의 소회일까요? 인간의 인문학적 소양 유지, 종교의 윤리적 방향성 제시, 기독교의 원색적 복음을 상실하면 상실할수록 인간은 결국 자신이 만든 기기들에 의해 지배당할 날이 빨라짐을 경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이신 유일한 통치자이심을 잃지 않는 영성이 더 시급한 오늘 우리들의 목적이어야 할 이유가 이제는 분명해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