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고 있지만 제 작년 연말,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일주일 신세를 졌을 때 월악 교회 후배가 책을 한 권 가지고 왔습니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미국 지성인 중에 한 명이었던 리 호이나키가 쓴 걸작이었습니다. 당시 랭던 킬키가 쓴 ‘산둥 수용소’의 감동이 저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던 때라 홈페이지를 통해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후배가 “산둥 수용소보다 감동이 몇 배나 더할 걸요”하고 주고 간 책이었습니다.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갑자기 이 책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을 독서했을 때, 호이나키에게 받은 여러 가지의 신선한 도전과 선명한 지성이 동반된 실천적 교훈을 교우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책 제목으로 정한 ‘비틀거리며’ 라는 단어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비틀거리는 사람의 대명사는 만취한 사람에게 많이 보입니다. 그것은 알코올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화학 작용 때문입니다. 허나 술에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비틀거리는 일들이 정상인에게 많이 보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 정상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은 상식의 사람마저도 비틀거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양관에서 책을 집필하면서 짬을 내 장강명의 장편 소설인 ‘한국이 싫어서’를 읽었습니다. 20대 중반의 여성인 주인공 계나가 도무지 한국이라는 사회구조 안에서는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시민권을 얻기까지의 우여곡절, 그리고 파란만장의 굴곡진 삶을 예리한 작가의 터치로 그려냄으로서 신자본주의의 노도와 같은 물결의 함몰되어 있는 내 조국한국 사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아픔의 소설이었습니다. 작가 장강명의 글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틀거리고 있는 대한민국” 이라고. 오죽하면 헬 조선, 헬 대한민국이라고 하겠습니까? 소설의 후반부에서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주인공인 계나가 호주 시민권을 얻었지만 호주에서 국외자처럼 대우를 받는 인종적 차별의 현장을 경험한 주인공아 조국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항변하는 독백장면이 있는데 마음이 아렸습니다.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이제 이 목사의 글 씀에 대한 진의를 밝히겠습니다. 저는 목사이기에 어쩔 수 없는 한계로 타인들이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재론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당연한 것이 아니냐?, 목사가 목을 걸고 있는 현장이 교회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별로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 진정성으로 담보하여 고백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목사는 교회를 무지하게 사랑합니다.” 이것도 박물관 같은 소리인데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비틀거리는 교회를 더 사랑합니다.” 라고. 조국을 공격한 계나처럼 한국교회에 대하여 비판적 성찰을 하며 무섭도록 냉정하게 공격하는 자들이 매일 더 많아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신학교 후배의 엽기적인 사건을 바라보던 한 교계 신문기자는 이 사건으로 개신교인 100,000명 정도가 이탈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아픈 글을 읽었습니다. 부인하고 싶지만 표피적인 신앙의 자리에 있는 자들이 그렇게 할 것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사는 이렇게 비틀거리는 한국교회를 더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비틀거리는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비틀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지치고 넘어져 쓰러져 있는 교회라도 하나님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로기 상태에 있는 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 목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본래 주님의 것인데 사람의 것으로 빼앗긴 교회를 하나님의 것으로 되돌리는 일을 바보처럼 천착하여 행하려고 합니다. 비틀거리지만 정의의 길로 간다고 말한 리 호이나키의 말 대로 하나님의 미슈파트(정의)와 체다카(공의)가 다시 살아나는 교회를 만들어 주님에게 돌려드리기 위해서 눈물의 씨앗을 그냥 뿌리렵니다. 그것이 저의 목회 사역 임기 중에 저에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눈물을 닦아 드리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에 주님의 복과 위로하심이 교우들에게 충만하기를 수양관에서 글을 쓰며 기도해 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