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은 유독이 가을이 짧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추운 도시 중에 하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내가 제천으로 이사를 와서 11년 전부터 항상 하는 말 가운데 습관처럼 굳어 버린 말이 있습니다.
“제천에는 가을 옷이 별로 필요 없어요.”
가을의 머묾이 너무 짧은 것은 금년에도 역시 매일반처럼 보이듯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졌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 맘 때 즈음이면 놓치고 싶지 않은 제천의 절경이 베론 성지이기에 지난 주간, 잠시 아내와 짬을 내어 다녀왔습니다. 몹시 가물어서 그런지 베론에 그렇게 멋들어지게 작품을 만들어주었던 단풍들 역시 너무 말라 있어 작년에 비해 턱없이 예쁘지 않아 참 많이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베론은 한국에 있는 단풍 절경지 10선에 들어가는 빼어난 곳이었기에 금년 베론의 단풍은 뭔가를 놓친 것 같은 서글픈 마음이 들 정도로 섭섭했습니다. 하지만 이왕 베론에 간 김에 아름다움의 핵심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갈 때마다 반겨주는 산책길에서 느끼는 사색의 美마저 놓칠 수는 없어 자분자분 숲길을 헤쳐 가며 떨어진 낙엽과 대화하며 그 길을 걸었습니다. 교회 옆 석재에서 들려오는 돌 깎는 공해 소리에 찌들려 있는 터라 항상 건조했는데 베론 산책 오솔길에서 만난 낙엽 밟는 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천상의 소리 같은 느낌을 가졌다면 지나친 묘사요 과장일까 싶지만 다른 표현이 없어 이리 고백하는 것을 용서해 주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이재철 목사의 글에서 황병기 교수께서 경주에 있는 에밀레 종소리의 진(眞) 소리를 들으려고 내려갔다가 수많은 인파들의 소음 때문에 적지 않게 실망하여 그 소리를 포기하려고 했을 때 지인이 에밀레종의 진 소리를 들으려면 반월성 언덕에 올라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올라 에밀레종의 보물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의미 있는 기록을 읽으며 깊은 감회에 젖은 적이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목사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해서 어떤 경우에는 사람의 소리에 파 묻혀 사색하고 성찰하는 시간과 유리(遊離)되어 사는 유감스러움을 경험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사는 철저히 고독해야 하며, 하나님과 독대해야 하고, 주님과 함께 대화해야하는 특별한 삶을 놓쳐서는 안 되는 데 세상의 소리, 사람의 소리로 인해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도 홀로 됨을 즐겨하셨고,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만남에 온 힘을 기울였는가를 느끼고 그 삶을 역시 추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목사임을 알기에 나 역시 그런 홀로 된 성찰의 길을, 사색의 길을, 사유함의 길을 걷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이런 맥으로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제 2의 고향 제천에 베론이라는 최고의 사색 장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목사로서 다행인지 모릅니다. 지난 주에 이렇게 좋은 장소를 왜 자주 찾지 못했지?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가능하면 이 길을 자주 걸으리라 다짐해 보았습니다.
폴 발레리 대학의 피에르 쌍소 교수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독백한 말이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한가로이 걷는 자(사색하며 걷는 자)는 아무 생각이 없이 걷는 자와 다르다. 그는 기억에 남을 만한 모험을 하는 중이며, 자기 존재의 상당 부분이 이 모험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의 태도에는 언제나 어떤 진지함이 배어 있다.”
남은여생이 얼마나 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소원이 있다면 목사로서 사는 동안 삶의 내용에 진지한 성찰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박함이 있습니다. 베론의 가을 녘에서 또 한 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