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김현승님의 아름다운 시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대학 입시를 위해 외우고 분석하여 시어에 담긴 내용들을 또 이해하고 그래서 점수를 땄어야 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저의 고등학교 시절은 슬픈 시대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계절, 사랑할 수 있는 계절, 호올로 있어 나를 생각하고 가꿀 수 있는 가을의 계절이 우리들에게 왔습니다. 김현승님의 읊조림처럼 나는 우리 세인지기들이 이번 가을이 조금은 더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 자람과 커감의 계절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서는 바로 이 때, 저는 여러 가지로 육체적인 변화로 인한 곤비함이 있어 특히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서면서 갑자기 신체의 바이오리듬에 있어서 면역력이 떨어짐으로 인해 불거진 알레르기성 비염 그리고 그로 인해 연쇄적으로 같이 공격하는 알레르기성 결막염을 매년 이 맘 때면 홍역을 앓는 것처럼 치르고 지나가는 바람에 몹시 예민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이 증상이 초기에 발병했을 때는 ‘내가 벌써’라는 정신적 미동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잡이하려고 나름 애를 쓰다 보니 조금은 편해지고 안정적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사에 있어서 피하고 싶은 것들이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수렁이 더 깊어지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들과 친구하며 살겠다는 의지가 오히려 정신 건강을 더 좋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해서 담임목사인 저 역시 그 원인으로 인해 속상해 하거나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수용의 넉넉함을 견지해서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한다고 할지라도 속사람은 더 새로워지는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해 보려 합니다. 교우들 중에 육체의 나약함으로 인해 많이 힘들어하는 지체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교우들이 이번 가을, 육체는 힘이 들어도 전술한 시처럼 기도하고, 사랑하고, 시간을 가꾸고 호올로 내 영혼을 주님께 집중해 보는 풍요로운 가을이 되기를 두 손 모아 봅니다. 그리하여 육체적인 것으로는 비교할 수 없은 참된 평강이 우리 세인 공동체에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