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귀에 인이 박히게 많이 들었습니다. 젊은 목사님이 오셨으니까 이제는 성경 말씀은 그만 말씀하시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세상에서 사는 방법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직전에 섬기던 교회의 젊은 안수집사가 부임하자마자 나에게 던진 돌직구였습니다. 듣기에 따라서 굉장히 신선한 요청처럼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저는 그 분을 목회하는 동안 참 조심했습니다. 이유는 사는 방법을 요구한 그 분은 성경에서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암적인 존재였고, 그가 행하는 일련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가치로서의 생각이 아니라 전적인 세속적 님비주의에 빠져서 전혀 신앙적이지 않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의 불신자요 얼마 전 신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하고 있는 친구가 쓴 ‘12 예언자의 영성’에서 언급한 ‘교회 안에 있는 실천적 무신론자’였습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전술한 안수집사의 말대로 ‘삶’을 설교하는 것은 중요한 임무요 포기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그 삶에 대한 설교가 정말로 중요한 설교적 테마라고 할지라도 양보할 수 없는 전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보이신 캐리그마를 전제한 삶의 적용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케리그마를 나에게 레마화 시키고 그렇게 나에게 레마화 된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밑줄 치며 설교자인 나도 살고 나에게 위임해 주신 양들도 살게 만드는 것이 오늘의 시대에 목사가 해야 하는 임무라고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목사에게 있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은 예수의 캐리그마입니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서울신학대학교와 대학원이라는 아름다운 동산에서 복음주의라고 표현하지만 실상은 아주 보수적인 계통의 신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 보수성은 사수해야할 진리라고 생각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목회 현장에 나아가 담대히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거듭할수록 뭔지는 확실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갖고 있는 신학적인 기초나 철학이 주는 빈곤함을 느꼈습니다. 해서 돌파구로 찾은 것이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이었습니다. 두 번째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 코스워크를 이수하면서 엄청난 충격에 휩 쌓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약을 강의하던 서중석 박사의 복음서 해석 강의를 들으면서 말 그대로 완전히 딴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의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당시 일천한 신학적인 기초로 두 가지의 양가감정에 빠져 혼란스러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① 연신원 교수들 거듭난 자들이 맞나? ② 나는 서울신학대학에서 그 동안 속았던 것은 아닌가? 이 갈등의 대 코마는 소위 말하는 진보적 신학을 맛보게 되면서 갖게 된 에피소드입니다. 당시에는 나름 참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진보적, 보수적 신학의 쌍두마차로 건강한 신학과 견강부회하지 않는 건강한 성경 해석 그리고 목회까지 접근할 수 있는 도움의 돌들이라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기에 가끔 생각하면서 참 유치한 발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쓴 웃음을 짓습니다. 지난 주, 페이스 북 절친인 사모님으로부터 인지도가 있는 아니 조금 더 나이브하게 표현하면 뜨고 있는 인지도 있는 목사님의 페북 방을 소개 받았습니다. 사모님의 일견에 의하면 그 목사님의 팔로워들로 구성되어 있는 독서 클럽이 있어 목사님께 소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와는 개인적으로 친구가 아닌 그 분의 방에 있는 독서 클럽을 서핑하게 위해 간접적으로 방문했습니다. 목적은 독서 클럽 방문이었는데 의외로 그 분이 올린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전혀 의도한 바가 아님) 재론하지만 그 분은 본인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을 묶어 책으로 발간하여 많은 동역자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주었고 그 결과 거의 5,000명에 육박하는 인원들이 팔로워 하는 소위 말해 인기 절정의 아주 감각이 있는 분입니다. 저 또한 그 분의 책을 읽고 참 감동에 흠뻑 젖었던 행복한 시간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우연히 그 분의 방에 들려 목적과는 달리 읽게 된 글을 보면서 순간, 조금은 먹먹했습니다. 그리고 먹먹하다 못해 착잡했고 그 착잡이 조금 심해지자 억제하기가 조금은 불편한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글은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모 선교단체의 대표 선교사와 미국에서 인지도가 있는 모 선교 단체 순회 설교자를 인용하여 그들이 전하고 있는 설교를 에둘러서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들의 설교와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설교자들이 두 가지의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 분이 올린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글입니다. ① 일상의 평범한 삶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를 내어놓아야 한 사람의 신앙의 진정성은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목사와 같이 업이 그런 일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과유불급의 적용이라고 비판합니다. 해서 매일 매일의 삶을 '죽음을 각오하고 감당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은 문제가 많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섣불리 설교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② 받은 은혜를 열심과 충성됨으로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향해 ‘너도 나처럼 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을 정죄하는 행동이 됨으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글을 쓴 분은 이런 본인의 입장을 용기 있게 전하기 위해 세 가지의 내용을 첨부합니다. 성경 구절로 사람을 때려잡는 사람, 자신의 충성과 헌신의 강도를 공동체의 기준과 잣대로 삼은 사람, ‘그런 식으로 주를 섬기는 것은 가짜 신앙이다.’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임을. 이렇게 지적한 그는 본인의 분명한 입장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맺습니다. “은혜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입부터 제대로 다스려야 합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은 찾아볼 수 가 없고 기고만장한 자세로 사람을 대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겉은 부드럽고 온유하지만 속으로는 사람을 한 단계 아래의 신앙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듭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제대로 받은 은혜가 아닙니다. 성질을 부리고 싶은 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열렬한 추종자들은 앞에 서 있는 리더를 돋보이게 하기 보다는 욕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복음을 깨달은 깊이와 넓이에 비례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식과 예의요. 따뜻함과 겸손함입니다.” 글을 쓰신 목사님은 경상도 출신답게 유머러스하게 한 마디 사족을 달았습니다. "으이오. 엥가히 합시다효!“ 저의 개인적 절친과 친구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인 앞에 인용한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 분의 따뜻함과 목회적인 배려, 그리고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구별하여 말씀을 전하기를 바라는 충정, 꿩 잡는 것이 매다는 식의 무리한 공격적 설교를 지양하라는 그 분의 진정성, 심지어 설교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마녀 사냥식의 종교적인 언어폭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는 일체의 일들을 멈추라는 충고를 의미 있게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지만 몇 가지 저 역시 그 분의 글에 불편한 심기가 들어 그의 표현대로 그의 글에 반기를 들고 싶어졌습니다. 본인인 인정하실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글에 담긴 위험성입니다. 첫째, 현장의 다양성을 개인의 목회적 성향으로 판단하는 심히 심각한 유감입니다. 저는 25년이라는 목회의 연륜 속에서 귀하게 깨달은 은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에는 정답이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이유는 참 복잡한 회중과 현장의 다양성 때문입니다. 사람만큼 변하지 않는 존재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를 날마다 고민합니다.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장만큼 신묘막측한 지구상의 또 다른 영역이 있을까 자꾸만 되새김질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실 때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방법도 역시 다양하고 그 다양성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인정함의 대상임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답은 결코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한 순회 선교단의 선교사, 미국의 래디컬 디사이플쉽에 입각하여 사역하는 목사에 대하여 저는 책과 영상을 통한 간접적인 지식이 그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전부입니다. 저 역시 그들의 영상과 책에 서술된 내용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또 그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사역하는 사람들의 사역의 방법론들은 그 설교를 들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사람도 소위 말하는 치유 사역 혹은 임파테이션 사역에 대하여 경기할 정도의 부정적인 신학적 사유를 하고 있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개인적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사람들의 사역이 인위적인 부분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들의 사역의 한 공간에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방법과 의도하심이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유감스러운 또 하나의 일을 그렇다면 목사는 무엇을 전하는 자이어야 하는가? 에 대한 자괴감에 대하여 설득력이 있는 대안 제시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는 무엇을 전하는 자이어야 할까? 의 묵답(默答)입니다. 문제를 제기한 목사님이 목사라는 사역자와 일상을 갖고 있는 평신도(별로 쓰고 싶지 않은 단어이지만 아직은 다른 단어가 정립되지 않아 그대로 씀)들을 같은 평면에 두고 싸잡아 같은 맥락에서 주의 일에 올인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압박하지 말라는 말이 저는 도리어 목사가 복음의 본질에 대한 말까지 시대에 맞게 말을 가려서 하라는 말의 압박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저만의 속 좁은 비평인가요? 노파심으로 저 역시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를 빙자한 언어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는 것을. 설교를 통하여 정죄하는 자들이 너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성도들이 도무지 현대 사회에서 감당할 수 없는 주님을 향한 전인적인 헌신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기에 전하지 말아야 하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가? 그렇다면 세례요한과 바울과 예수님의 외침은 AD 1C 에 당시의 상황을 upside down 하는 심각한 폭력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들의 공격적인 선언을 재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그들의 외침은 종교적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자들을 향한 외침이었다고 에두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외침에서 제외되는 부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 예수님의 도를 따라가는 목회자들이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무모한 내용들을 배제하고 전하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전해야 하는 것인가? 대한 설득력이 있는 메시지를 듣고 싶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10절에서 행했던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의 진정성이 있었던 외침처럼 아직은 이 땅에 많은 건강한 목회자와 설교자들이 정죄나 공격이 아닌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는 광야의 소리를 전하고 있음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대하지만 상황에 맞는 설교를 요구한 문제를 제기한 목회자의 글로 인하여 대부분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사역하는 목회자들이 용기를 잃게 되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 나는 은혜로운 말로 입술의 할례를 받고 따뜻함과 상식과 예의와 겸손함의 언어로 강단을 바꾸라는 그의 말에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은 그의 권면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현장에 따라 그렇게 메시지를 선포하는 자들을 도매꿈으로 매도하는 것처럼 들려 왠지 모르게 불편해졌습니다. 신학교 시절,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를 읽고 나난 치셤으로 살 것인가? 안셀모로 살 것인가? 기로에서 안셀모가 아닌 치셤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길이 주의 종이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5년 나의 목회의 큰 좌표가 되어 그렇게 목회하는 목사 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목회의 현장에서 25년을 살면서 신학교 시절에 보지 못했던 영역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셀모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해 나아가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후로는 깨닫고 까불거나 경거망동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평생 배우며 사는 자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