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혼이 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혼나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제발 찬송가 좀 제대로 부르라고. 성경을 읽을 때 빼놓지 않고 읽으라고. 찬송을 부를 때에 절에 맞추어 부르라고. 가끔, 1절을 부르다가 3절로 건너뛰고, 어느 날에는 1절 첫 소절과 2절 두 번 째 소절을 짬뽕으로 부르고 도대체 대책이 한 선다고. 성경을 읽을 때도 대동소이하다고. 뭐 이런 것들입니다. 시간이 이제는 흘렀지만 저도 참 멋쩍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새벽예배 시간에 다 같이 사도신경을 고백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합니다. 라고 멘트를 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고백하였는데 훌륭한 성도들이 잠시 멈칫하다가 끝까지 주기도문으로 담임목사를 위해 대치해 주었던 해프닝을. 지난 주 수요일,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로 시작하는 ‘임재’라는 찬송을 예배 전에 몇 번 부르고 단 위에 올라갔는데 실전에 들어가 도무지 엇박자를 따라잡지 못해 헤매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훌륭한 교우들 역시 같이 틀려가며 끝까지 함께 부르는 전우의식과 연대감을 발휘(ㅎㅎ)해 주어 너무 감사했습니다. 요즈음 나오는 복음성가는 왜 그리도 박자 따라잡기가 쉽지 않은지 작곡가들이 미워집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긍정의 의미로 성숙해 진다는 것을 분명히 포함할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의 한 장르인 소설만큼은 젊은 소설가가 나이를 먹은 소설가의 작품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어떤 지인의 상식적인 가르침을 저 또한 동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며 삶의 길을 제시할 수 그릇이 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허나 반면 한 해 한 해가 가면서 피부에 신축성이 없어지고 탄력이 없어지는 노화 현상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감각이 무뎌진다는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술했던 저의 실수들이 많아지는 바로 일련의 일들은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 말고는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은 먹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감각이 떨어져 실수하게 되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현상들이 개인적인 일상에서 나타날 때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당사자인 제 개인에게 임하는 자괴감은 실로 무척이나 큽니다. 아내는 집중력이 떨어질 때니까 더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채근하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말처럼 쉽습니까?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5학년 4반인데 벌써 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저에게도 충격 그 자체입니다. 저만 그런가 싶어 의기소침 되어 동기들 모임에서 저의 고민을 상담했더니 몇 몇 친구들은 저보다 훨씬 더 중증인 친구들이 있어 상대적으로 위로를 받지만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습니다. 이전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는 개인적인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멋있게 늙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정말로 멋있게 늙었으면 좋겠습니다. 추하지 않게 말입니다. 해서 하는 말인데 이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노력을 더 경주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전에 5번 불렀던 노래를 10번 부르기로. 이전에는 감각으로 드렸던 예배 순서를 하나하나 눈으로 짚어가면서 드리기로. 가능하면 성경 봉독을 할 때는 근시방지 안경을 바꾸어 끼는 수고를 해서라도 실수를 줄이도록 노력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말대로 제 기도의 제목에 이제는 한 가지를 덧 붙여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벌써 이러면 아니되옵나이다. 집중력을 주옵소서!” 라고. 감각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래도 이전에는 참 많이 들었던 말이 있었는데. “목사님은 참 심플해요.” 아 옛날이여.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