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 '명량'은 솔직히 졸작이죠. 흥행은 영화의 인기라기보다 이순신 장군의 인기로 해석해야 할 듯. '활'은 참 괜찮았는데.” 영화 ‘명량’에 대하여 진중권 교수가 던진 한 마디의 태클 가지고 세간에서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의 이런 발언은 지금 최단 기간 1,200만 명을 넘어선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함으로 어떤 의미로 보면 찬물을 끼얹는 혹평이기에 설왕설래 하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개인적인 견해이기는 하지만 저도 진중권 교수가 말한 돌직구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공감합니다. 영화 ‘명량’ 에 대한 성공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주식회사 빅스톤 픽쳐스가 제작을 하고 CJ 엔터테인먼트가 배급을 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재정적인 스폰을 갖고 있는 영화가 성공하지 않으면 어떤 영화가 성공할 수 있겠는가? 물으면 그 답이 나옵니다. 독립 영화의 많은 작품들이 수준 있는 작품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제도권 하에서 당연한 결과라고 여겨지는 것이 상식의 일이라는 것은 진중권 교수의 일갈을 대입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의 영웅 중의 영웅 그래서 영웅이라는 단어보다는 성웅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이순신 장군의 드라마와 같은 삶의 파노라마가 오늘날 같이 전무한 정치적 리더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너무나도 기막히게 부합된 것도 명량의 성공 비결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과도 같은 성웅적인 리더의 등장을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영화에서 등장한 영웅적인 주인공의 삶이 현실에서 그대로 나타날 것이라는 신기루 같은 기대감은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을 때 도리어 적지 않은 좌절의식으로 대체 될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런 도식에 의해 벌어지는 현실적인 참담함은 도리어 의욕을 꺾고 더 일어서기를 어렵게 하는 집단적 절망의 공동체로 우리 사회를 만들까 적지 않게 염려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희극 배우인 로빈 윌리암스가 사망했다는 토픽을 인터넷 서핑을 통해 보았습니다. 그의 죽음 원인은 자살로 가늠되고 있습니다. 그가 열연한 ‘굿 윌 헌팅’에서 느꼈던 감동의 여운 때문에 그에 대한 인상이 짙어져 있었는데 목사로 사역하면서 또 한 번 그를 통해 내 목회의 한 신학적 영역을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어 준 ‘죽은 시인의 사회’는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를 폐쇄적인 보수적 가두리 안에서 나를 방어할 수 있는 편향적 기움에서 반항하게 해주는 모토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This ,too, shall pass away.’ 와 함께 ‘Carpe diem’ 을 지금도 나는 나의 목양적 현장에서 날마다 되새김질하는 응원 문구로 삼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로빈 윌리암스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 아주 묘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 하라고 그렇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던 그는 현실에서 왜 존 키딩으로 살지 못했을까? 또 그는 왜 숀 맥과이어로 살지 못했을까 하는 여진이 진동하는 마음 말입니다. “적어도 그가 영화 속의 키딩처럼, 숀 맥과이어처럼만 현실에서도 살았다면 그에게 우울증은 없었을 데, 적어도 그렇게만 살았다면 알코올 중독에 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자살이라는 비극이 아니라 정말 멋진 인생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 데.” 그러다가 도달한 결론이 이것이었습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교훈을. 우리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가 아닌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라는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붙들고 최선을 다할 때만 이루어지는 진짜 승리의 삶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