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전에 절규한 이 외침을 가장 잘 표현한 글이 없을까를 추적하다가 시인 박두진이 쓴 ‘갈보리의 노래1’을 발견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시인은 예수의 가장 큰 외로움을 십자가에 달렸을 때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의 얼굴 돌리심을 이렇게 기막힌 표현으로 탄식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해도 차마 밝은 채론 비칠 수가 없어 낯을 가려 밤처럼 캄캄했을 뿐. 방울방울 가슴의 하늘에서 내려 맺는 푸른 피를 떨구며, 아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늬 그 사랑일래 지지러져 죽어간 이의 바람 자듯 잦아드는 숨결 소리 뿐. 언덕이여. 언덕이여. 텅 비인 언덕이여. 아무 일도 네겐 다시 없었더니라. 마리아와 살로메와 야고보와 마리아와 멀리서 연인들이 흐느껴 울 뿐. 몇 오리의 풀잎이나 불리웠을지, 휘휘로히 바람 결에 불리웠을지, 언덕이여. 죽음이여. 언덕이여. 고요여. 아무 일도 네겐 다시 없었더니라” 사무침으로 이 시를 읽다가 2연 하반구에서 심장이 멎는 듯 한 전율함을 느낍니다. ‘푸른 피’ 라는 시어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흘리신 피가 붉은 피가 아니라 ‘푸른 피’랍니다. 의사들은 인간의 가장 극한의 상태가 지속될 때 의학적으로 혈액의 색깔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의학적인 기초로 예수의 피에 대하여 갑론을박하기를 목회자로서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도리어 주님이 흘린 피가 시인의 언어로 ‘푸른 피’라고 해석한 것을 100% 지지하는 목회자로서의 갖고 있는 영적 자존감으로서의 신학적 기초가 있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2000년 전의 피는 붉었습니다. 그 분이 흘리신 선혈이 낭자한 붉은 피는 죄악으로 인해 찌들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징인 해골 골짜기에서 흘리심으로 인해 인류 구원의 보편적인 은혜를 주신 피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2,000여년 흘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이 대한민국에서 흘리시는 피는 ‘푸른 피’입니다. 예수께서는 지난 세기동안 계속해서 피조물을 위해 붉은 피를 흘려주셨지만 그 피의 가치는 무시되었습니다. 그 피는 누가복음 4:18-19절에 선포된 이사야의 예언적 선포의 대상자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적어도 오늘 내가 사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들은 예수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로 무시되고 짓밟히고 거부되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아픔은 망각시키려는 자들의 의도대로 망각되고 있어 이제는 또 다른 아픔들이 곪고 있는 비극적인 오늘, 졸지에 부모들과 원치 않는 헤어짐이라는 깊은 절망을 천길 물속에서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생을 마감한 우리들의 아들딸들이건만 노래방에서도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지겨운 것인데 도대체 며칠씩이나 세월호, 세월호 타령하며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가! 대들고 있는 엄마 전위부대원들이 큰소리 쳐도 괜찮은 오늘, 꿈 많던 젊은이가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들어선 나라 지킴의 현장에서 무감각하게 성장해도 방치되며 자랐던 또 다른 젊은이들의 악마적이고 무감각적인 폭력적 확인사살로 인해 피멍들고 심장이 멎었음에도 본인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한 젊은이의 억울한 죽음을 은폐하려고 기를 쓰는 기득권자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 오늘, 힘이 정의라고 외치는 자들이 권력을 잡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미슈파트(공의)와 쯔다카(정의)는 일찌감치 쓰레기통에 버려진 오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흘리신 피는 이제는 멍들어 푸른 피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친구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피 멍든 한국 교회’ 나는 SNS 상에서 교제하며 전해 준 친구의 이 표현을 읽으며 내심 울었습니다. 피멍든 한국 교회를 섬기는 현직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피멍든 한국을 위해 예언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무서우리만큼 혹독한 냉철함으로 내 교회를 둘러봅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 2f) 오늘 이 주님의 소리가 크게 공명되어 귓가를 때립니다. 피 멍든 한국교회에 흐르는 주님의 피는 푸른 피가 맞습니다. 주님이 오늘 흘리시는 푸른 피를 붉은 보혈의 피로 한국교회와 그 교회 안에 있는 목사와 예수쟁이들은 다시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성찰의 고민이 깊어지는 오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