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성경을 읽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짠하게 올라오는 감성적인 내용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0-11) 이 구절은 바울 사도가 로마의 법정으로 가서 재판을 받기 전, 예심을 거쳐야 했기에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디모데후서를 작성하면서 그의 내적인 고독과 괴로움을 솔직담백하게 토로한 글인데 개인적으로 이 글이 저에게는 촉촉한 감동을 주는 것은 제가 목사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로마의 춥고 습한 감옥, 그래서 디모데에게 로마를 방문할 때 추위를 피하기 위해 겉옷을 가지고 오라 했고 책은 가죽에 쓴 것만을 갖고 오라고 당부했을 정도의 열악한 환경이었던 로마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던 바울,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십분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이곳에서 바울은 환경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버림받는 최고의 아픔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믿었던 데마, 그레스게, 디도까지 바울을 떠나 버립니다. 언급한 세 명 전체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들이 바울을 떠난 것은 세상을 사랑해서라고 진단한 대목에서는 바울의 쓰라림까지 느끼게 합니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데 바울의 이 극단적인 아픔의 와중에도 저는 한 사람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을 유보할 수 있었습니다. 한 구절 때문입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다 바울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가버렸지만 습하고 춥고 생사가 불투명한 최악의 악조건 아래에서도 바울의 몸을 돌보아 주었던 주치의 누가만은 바울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 대목은 폭풍 감동입니다. 지난 금요일, 유병언씨의 큰 아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장기간의 도피 생활로 인해 상당히 초췌한 모습으로 결국은 경찰에 의해 신병이 확보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미 삶이 파탄 난 그의 옆에는 그의 도피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운 구원파 여신도가 있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유병언 일가를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모를 리 없건만 그 여성은 그 무모한 게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조사 과정에서 그 여성이 유병언씨의 장남을 끝까지 도피하도록 도운 전모가 밝혀지겠지만 이유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이 한 가지 제가 갖고 있는 감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병언 일가가 너무 부럽습니다.’ 현행법을 어기고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고 종교를 빙자한 개인 축재의 철면피 범들이 부럽다고 하는 것이 목사로서 제정신입니까? 라고 저에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저의 감정입니다. 재론하지만 부럽습니다. 무엇이 부러운지 아십니까? 유병언 일가가 소유한 일련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송두리째 자기 인생을 걸 정도로 헌신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하드웨어를 그들이 가졌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구원파는 이단입니다. 그런데 그 이단이 창궐했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초토화되어야 할 이단인데 흥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를 생각하면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목사로서의 자괴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건 누가 말입니다. 1,000명 정도 모이는 교회를 섬기는 친구 목사가 일전에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목사, 사람이 없다. 사람이. 예수를 위해 죽을 사람이.” 목회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신실한 친구의 절규가 저의 귀에 공명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부럽고 또 부럽네요. 우리들이 악의 축이라고 폭격하고 있는 이단 종파에는 자기의 신념에 목숨을 건 사람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세인교회에 누가는 누구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