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 내내 이성적으로 고민하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펜실베니아 주립 대학에서 미디어 관련 학문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인 학자인 강인규 교수가 쓴‘망가뜨는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을 읽다가 느낀 소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강 교수는 외국에 거주하면서 조국의 현실을 진보적인 관점에서 읽어내려가며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의 보고에 기록된 한 대목이 충격적이었습니다. “한국사회는 빠른 속도로 망해가고 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격인데 사족을 덧붙이자면 저자는 그 망해가는 속도가 감당하기 힘든 정도로 가속도가 붙어 있다고까지 진단하는 대목에서는 비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매국적인 망발처럼 느껴지는 발언을 한 것은 조국의 멸문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가 제시하고 있는 조국사회가 빠르게 망하가고 있다고 해석한 사회적 지표들과 데이터들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들이기에 아펐습니다. 예를 들자면 전세계적 대비 행복지수 최하위, 소득의 양극화 속도 전 세계 1위, OECD 국가 대비 복지 수준 최하위, 청소년 자살률 OECD 평균의 두 배 등의 자료들은 오늘 우리 대한민국호의 현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진단이 학자에 의해 제시되었음에도 사회학적인 구도로 볼 때 반론이나 아니면 대안을 찾아야 할 터인데 그 여지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입니다. 우리는 몇 주 전부터 세월호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집단적으로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 공격의 상처와 후유증이 너무 커서 언제 치유를 받게될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난감함에 봉착해 있습니다. 세월호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습격을 당한 뒤에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서 동서남북을 쳐다보니 그 괴물은 그 자체와 연결고리가 맺어져 있는 집단적 님비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 기형 괴물임을 알게 되니 더 씁쓸하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 괴물이 판을 치고 있는 대한민국이 망하가고 있다는 강 교수의 지적이 그래서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저만의 느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강 교수는 책의 말미에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침몰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배를 구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 가지의 철학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것은‘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한‘우리’속에서만 ‘나’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그의 이 철학적인 대안 제시가 어떻게 느껴집니까? 모범 답안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너무 교과서적이지 않습니까? 이 대안 제시에 누가 감히 반론할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강 교수의 모범 답안 제시에 대하여 부분적 동의를 표하고 싶습니다.그러나 제가 부분적 동의라고 표현한 것은 그의 주장에 대하여 심정적으로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완전 동의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강 교수의 대안 제시를 저는 인본(人本)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인본이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인가? 를 스스로 자문한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100%의 부정적인 답으로 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본은 가치 중립적입니다. 그래서 인본은 그 가치의 유익의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만에 하나 인본의 사상으로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이상이며 현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데올로기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의 나라인 신본(神本)일 때만 가능한 것임을 저는 동의합니다. C.S. 루이스가 남긴 선과 악에 대한 최고의 통찰력을 보여준 걸작으로 평가 받는‘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는 그의 조카 악마인 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하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을 한다면 환자(사람)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내가 강 교수의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를 하는 이유는‘나’가 아니라‘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세상도 인본이라는 틀을 동원하여 이룰 수 있다는 섣부른 확신은 세상이 목적이 되고 믿음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일이기에 일축하여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신본(神本)은 본의 근원이지 부수적 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인본을 논할 때가 아니라 심각하게 신본을 논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