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녀 권사님’은 제 고향 교회에서 잊을 수 없는 어르신 중에 한 분입니다. 이유는 저의 어린 시절 참 많은 사랑을 개인적으로 베풀어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이른 나이에 여의고 어린 3녀 1남을 홀로 된 몸으로 양육해야 하는 1970년대 이후의 삶의 질곡을 고스란히 껴않았어야 할 기막힘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시장 좌판에서 하지 않은 장사가 없이 고생을 하면서 자녀들을 홀로 키우셨습니다. 시장에서 하루 종일 만진 생선으로 인해 항상 몸에서 비릿내를 달고 사셨던 권사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거니 비겁하게 인생을 사신 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르신의 남편이 곧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홀로 된 이후에 삶의 질고 앞에서 아들딸들을 보란 듯이 키워 나아가는 데에 신앙은 어르신에게 결정적인 용기요, 힘의 원천이요, 삶을 승리하도록 해주는 백그라운드였습니다. 당신은 외롭고 힘이 든 인생이셨지만 하루에 3시간 이상은 하나님께 자녀들과 교회를 위해 엎드리셨습니다. 무슨 수가 있어도 이 일은 거르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기도의 대장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자녀들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큰 딸이 신학에 입문하여 평생 주의 종으로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고 두 딸은 세상에 없는 효녀들로 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고 아들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제시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교회 사랑도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의 궂은일에 항상 1등이셨습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교회 청소를 비롯하여 이름이 빛나지 않는 일들은 항상 그림자처럼 숨어 일하셨습니다. 저의 고등부 시절, 앞으로 강덕이는 뭔가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 될 것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권사님, 믿지 않으시던 아버님으로 인해 학창 시절 신앙생활이 그리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고 3때 그 어느 때보다도 새벽예배에 열심히 참석을 했지만 집에서 나올 때 이유가 항상 이른 시간 등교 후 공부가 이유였기에 새벽 예배를 마치고 곧바로 등교를 할 때면 아침을 굶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 일을 아신 권사님은 저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여주시며 학교에 빈속으로 가면 머리가 깨끗하지 않다고 아들처럼 챙겨주셨던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은 주머니에 뭔가를 찔려 주시기에 꺼내보니 통학 버스 회수권 한 달 치였습니다. 당신의 생활 형편에 한 달 치 버스 회수권은 상당한 부담이셨을 텐데 항상 손해 보시는 사랑으로 전해 주시던 권사님을 무심한 이강덕 목사는 지난 주 영정으로 뵈었습니다. 언젠가는 한 번 그 사랑의 보답을 하리라 마음먹었건만 끝내 그 사랑의 빚을 갚지 못한 죄를 짓고 영정으로 어르신을 뵈면서 후회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국화꽃을 한송이를 눈물로 단에 바칠 때 당신이 즐겨 쓰시던 오래된 성경에 펼쳐진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시편 90:4-6) 어쩌면 그리도 가실 때까지 교훈을 주고 가시는지, 그 옛날 아주 힘들었던 시절 베풀어주셨던 사랑의 빚 때문에 가슴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정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권사님, 사랑의 빚을 갚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당신이 베푸셨던 사랑을 전함으로 그 사랑의 빚을 갚겠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는 그곳에서 응원해 주십시오. 당신이 베푼 사랑을 전하는 목사로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살 수 있도록.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권사님. 그 날 다시 뵙겠습니다.” 뒤돌아보면 모두가 사랑이었습니다. 영정 속에서 다소곳한 한복을 차려 입으신 권사님의 미소는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권사님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복녀(福女)이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