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 훈련 코스 중에 하나가 기숙사 입사가 있었기에 3학년 1학기 입사한 학기를 제외하고는 인천에서 집 밥을 먹으며 나름 편하게 대학 생활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지방이 고향인 친구들이 매 학기마다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인천이 고향인 것에 대해 감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지, 이제 30년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당시 그 고생을 다시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난 주, 아들의 개강을 한 주 앞두고 기숙사로 아들의 짐을 옮겨주는 짐꾼이 되었습니다.
짐을 싸는데 말 그대로 정말로 이삿짐처럼 살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들에게 한 마디 던지며 짜증을 냈습니다.
“살림 차리니?”
저는 한 학기 기숙사를 입사할 때 가지고 간 짐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아들놈은 웬 놈의 짐이 이리도 많은지 이사를 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들이 군에 있을 때는 피부로 강하게 체감하지 못하던 일들이 이제는 무겁게 다가옵니다.
군에서 제대를 한 뒤 복학을 하고 학부 생활이 이제 3학기가 남은 아들을 보면서 잠이 제대로 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에비는 그런대로 선배 목사님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들을 그래도 먹을 수 있는 시대에 목회를 했지만 아들의 시대는 말 그대로 순교적 영성이 없으면 도무지 목회를 할 수 없는 패역이 극을 달릴 시대이기에 가끔은 아들을 생각할 때 애처로움이 극에 달하여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머리를 숙일 때가 더 많아졌습니다.
차에 가득 실은 아들의 짐을 보면서 앞으로 목회자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들이 감당해야 할 짐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에비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짐꾼이 되어 30여 년 전, 이 땅에 푸르른 예수의 계절이 오게 하리라는 야무진 꿈을 안고 서울신학대학교의 교문을 들어설 때 헐몬산에서 베드로가 고백한‘여기가 좋사오니’의 믿음을 갖고 통과했던 기억이 뇌리에 생생합니다.
30년이 지난 오늘, 아들과 아들의 짐을 내려주고 아내와 함께 모교를 빠져 나오는데 이제는 습관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또 하나님께 드리며 중보 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을 사용하여 주옵소서. 시대의 패역함 속에서 엘리야의 영성을 배우고 하시고 엘리사의 권능을 갑절로 부여 받는 선지학교에서의 이번 학기가 되게 하옵소서. 시대가 아무리 예수 없는 시대와 예수 없기를 바라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들에게는 예수만이 숨을 쉬는 이유가 되게 하시고 앞으로 사역의 현장에서 혹시 만나는 영적인 호렙산에서의 엘리야의 침체가 임한다고 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때때마다 직접 로뎀 나무가 되어 주셔서 이기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들의 사역과 공부의 과정에 앉아만 계시지 말고 일어서서 응원하여 주옵소서.”
짐꾼으로 매 학기마다 두 번씩 학교를 찾지만 그 때마다 왜 이리도 비장한 기도들을 드리게 되는지 아들을 신학교에 보낸 아비 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짐꾼으로 모교에 다녀오면서 아들의 짐을 에비가 짊어지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마음으로만 응원합니다.
아들이 저보다 훨씬 더 잘 해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