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프로스트가 노래한 글을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먼 훗날 어디선가 나는 한 숨 지으며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어느 숲에서 두 갈래 길 만나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내 인생 온통 달라졌노라고.”
어린 시절이었지만 가슴의 한 켠에 프로스트의 글이 나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어 담아 놓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어느 길을 택하는가? 에 따라 삶의 내용이 갈린다고 하는 긴장감은 그래서 저에게는 항상 ing의 현재진행의 가르침으로 살아서 움직입니다.
신학교를 입학하자마자 읽었던 책이 크로닌의‘천국의 열쇠’였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편입학하여 하나님께서 읽게 하셨던 책이 왜‘천국의 열쇠’이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로스트의 고백과 맞물려 항상 치셤과 안셀모 신부의 경계선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면서도 항상 치셤에게로 기울었던 것은 나의 의지이기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자위하며 살았던 삶의 흔적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현장은 항상 치셤과 안셀모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간 길과 가지 않은 길의 긴장감으로 첨예화되어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요즈음의 목회 환경은 치셤으로 살려는 자의(自意)와는 상관없이 안셀모로 살라는 타의(他意)의 물리력이 너무 강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가지 않은 길의 고집과 모험을 버리고 누구나 가 본 경험이 있는 쉽고 안전한 길을 독려하는 아우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빈틈을 보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목회적 철학이나 역사적 의식이 없이 살아가는 목사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향하여 가게 되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치열한 의식이 없이는 목사의 길을 가기 쉽지 않은 오늘, 참 오랜만에 지난 주간 아내와 함께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휴가는 여타 다른 때와는 달리 신영복 교수께서 쓴‘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참 읽고 싶었던 책 한권만 욕심내기로 하고 아내와 함께 이 곳 저 곳을 경험하기로 했던 것은 영적 긴장을 풀어주는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전나무 숲을 걸으며 숲 속에 피어 있는 상사화를 보면서, 일출에만 집중하는 무릇 사람들과는 달리 서해 바다 지평선으로 펼쳐지는 장관의 해넘이를 보면서, 썰물이 되어 물빠진 해변의 모래 백사장을 걸으며, 돌 게들의 삶의 치열함을 엿보게 해 주는 그들만의 일정한 집들을 관찰하면서, 먹고 싶었던 조개구이도 한 끼하면서, 해변에서 폭죽을 터트리며 닭싸움을 하며 마냥 즐거워하는 그룹의 젊은 청년들을 보면서, 늦은 휴가를 잡아 저희들처럼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는 부부들을 보면서, 시골의 조그마한 사찰에 들려 기와불사의 소원을 아뢰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원 내용들을 보면서, 이른 아침 풍어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아가는 지척의 조그마한 어선들을 보면서, 목욕탕에서 어린 아들 둘을 목욕시키는 기운 센 젊은 아빠를 보면서, 휴양림 입구에 늠름하게 서 있는 지하여장군과 천하대장군의 조각을 보면서, 아빠와 엄마의 모처럼의 휴가를 격려하는 아들의 카톡 문자를 보면서 지나온 삶이 부질없는 삶이 아니었음에 감사했고 또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조건들임을 각인하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이번 휴가는 색다른 공부의 시간이었습니다.
순간은 힘들어도 그 순간은 또 지나갈 것들이고 지나 간 것들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면 그것 또한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감사의 내용들임을 알려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어도 알게 해준 귀한 공부의 시간이었습니다.
금요일 오후,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어진 일상은 또 치열할 것이고 긴장감이 팽배할 것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또한 나를 성숙하게 하는 또 하나의 길임을 알기에 금년 하반기는 의미 있게 사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치셤으로 살려는 역사의식과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이지만 그 길을 가려는 부족한 사람의 지속적인 목양의 사역에 하나님이 먼저 앞서 이 사람의 무지함을 일깨워주시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