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부모님들이 여름의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소천하시는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은 면역성이 많이 떨어진 노령의 나이이기에 그렇게 삶을 마감하게 된 것이지요.
이해가 됩니다.
장마가 끝난 뒤 숨이 가쁘게 차오르는 폭염의 연속이니 건강한 사람들도 지치는데 연로하신 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지난 주 목욕탕 입구에서 한 중년 여성이 티켓을 구매하며 주인에게 이렇게 넋두리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피신하러 왔어요.’
휴가를 잡고 더위를 피하러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견디기는 너무 힘들고 해서 결정한 선택이 목욕탕에서 이열치열하며 그래도 물과 함께 더위를 피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겠지요.
저 역시 한 주간을 보내면서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특히 더위를 잘 참지 못하는 탓에 금년 여름이 무척이나 힘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근래 이런 더위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많은 사람들의 하소연이 부척이나 많이 들리는 것은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저 역시 체감온도로 느끼는 이런 더위는 처음인 듯 보이니까요.
금요일 아침, 조간신문에 무척이나 염려스러운 기사 두 개를 읽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2050년에 한반도에 겨울이 사라진다.”
“북극 온난화로 33년 만에 면적의 반이 녹아”
사정이 이러다 보면 영화 상영관에서 빙하기를 주제로 한‘설국열차’가 인기몰이에 성공하는 것은 단지 재미와 박진감이 있는 재난 블랙버스터 영화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앞으로 닥칠 불행의 가능성을 충분히 공간하는 현대인들의 심리와 부합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젠가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소위 탕자의 비유로 일컬어짐) 를 설교하면서 설교 제목을‘더 늦기 전에’라고 명명하여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칼럼을 쓰면서 그 제목이 불현듯 기억의 가장자리를 스칩니다.
정말로 더 늦으면 기회가 없는데 멀리 가지 않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만 보더라도 생태계를 파괴하는 죄악의 무감각과 안타까움의 모습은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적조와 녹조를 통한 생태계의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하는데도 아직도 이 땅은 포크레인 공화국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생태학자로 잘 알려진 지인이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한 일간신문의 지면을 빌어 할 수만 있다면 4대강 보를 폭파라도 하고 싶다고 했을까 싶습니다.
북극곰들이 생태계 파괴 주범인 지구 온난화로 인해 먹이를 찾을 수 없어 아사한 상태의 사체로 발견되는 비극의 씨앗들이 이제는 현실에서 발견되는 데에도 지구상 선진국으로 불리는 10%의 나라들은 자국의 경제 이익과 논리를 앞세워 온실가스 줄이기에 극단적 이기성을 보이고 있어 교토의정서가 시행된 2005년 이후 전혀 좋아질 기미가 없는 것 역시 우리 시대가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증거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여름에는 더워야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은 사계절의 섭리가 정확해야 곡식도 자연도 건강할 수 있다는 낭만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더위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의 산물로 자행되고 있는 비극의 결과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서부동 1003번지는 물론이고 제천 전역에 포크레인 소리와 아스콘을 깔고 있는 기계음 소리가 굉음을 내고 있습니다.
더위와 맞물려 쓰러질 정도의 소음이 여름을 더 힘들게 합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을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사람들의 돌이킴이 있기를 간절하게 기대하며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