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뜬금없이 아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대체적으로 용돈과 관계가 없으면 전화를 하지 않는 아들이 전화를 했기에 부대에서 무슨 일이 있나 덜컹하는 마음으로 통화를 했습니다.
용건인 즉은 제대를 앞두고 있는 아들에게 담임목사께서 배려 차원에서 화요일 새벽예배 설교를 인도하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설교 준비를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저에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군에서 제대를 한 뒤 영등포 성결교회에서 신학대학 2학년 때부터 교육 전도사 사역을 하면서 설교를 했던 경험이 있던 지라 에비의 입장에서 신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에 간 아들이 설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되고 어설픈 일인가를 잘 알기에 설교를 앞둔 아들의 염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아들의 SOS 는 제 설교를 듣다가 인상 깊게 남은 마가복음 6:45절 이하에 기록된 오병이어 기적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던 오병이어의 장소를 떠나 건너편 벳세다로 갈 것을 재촉하셨던 바로 그 본문으로 새벽 설교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제목도‘재촉하사’로 정했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들려오는 아들의 설교 준비 포맷은 이러했습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던 장소인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율리아스 벳세다’에 머물며 주님과 함께 세속적인 영광의 자리를 하나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주님은 그들의 속내를 아시고 찬물을 끼얹으시며 그곳을 떠나 바다 건너 편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해 있었던‘갈릴리 벳세다’로 떠날 것을 재촉하시며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세속적 영광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불편하지만 그리고 부담되지만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삶이어야 함을 전하려 한다고 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설교 논지가 이런 데 이렇게 설교를 해도 되요?”
설교를 준비했는데 잘 전하는 것인지를 확인 받기 위해 아버지의 최종적인 사인을 요구하는 아들과의 전화를 하면서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의 내용은 어떤 의미로 보면 자기의 고유한 설교가 아닌 아버지의 설교를 거의 이미테이션 한 설교였지만 그래도 지난 화요일 새벽예배 설교를 해야 하는 부담을 토로하는 아들의 전화를 받으면서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아들이 고민한 흔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방향성이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지 에비의 성향과 맞았기 때문입니다.
실천신학자인 유명한 설교가인 필립 브룩스가‘설교란 인격을 통한 하나님 말씀의 전달’이라 말한 것처럼 설교는 정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사역이요 선포입니다.
그러기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나름 목회의 인턴쉽을 가진 뒤에 어느 정도 자신을 책임 질 줄 아는 인격을 갖추고 설교를 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소견이기에 신학교 시절에는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아들은 아직은 설교를 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공 예배 설교를 해야 하는 아들의 부담감이 적지 않았을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화요일 새벽에 예배당 나오자마자 아들의 설교 사역을 위해 중보 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설교를 잘 하려고 하지 말고 준비한 말씀을 발음을 정확히 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감 있게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후에 슬쩍 전화를 했습니다.
“아들, 새벽예배 말씀 잘 전했니?”
전화너머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가 시큰둥했습니다.
“조금은 삐걱댔지만 뭐 그런대로 전했어요. 근데 아버지, 왜 그렇게 목이 타요. 혼났어요. 목말라서.”
수고했다고 말해 주고 전화를 끊고 혼잣말로 주절댔습니다.
“이 놈아, 아빠는 아직도 목이 탄다.”
앞으로 계속해서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사역을 해야 하는 아들이 그 사역에 걸 맞는 영성과 지성에 있어 실력 있는 주의 종으로 성장해 주기를 간절히 중보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