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 시절, 인천에서 통학을 하던 탓에 나에게는 기숙사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기숙사는 지방에서 유학 차 올라온 아이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에게는 항상 이방인들의 지역으로 여겨졌던 기숙사가 제대 후 복학을 한 3학년 1학기 때 내 삶의 많은 것들을 남긴 추억의 흔적이 되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의무입사’ 영성 훈련의 일환으로 졸업사정의 필수 코스가 의무 입사였습니다. 신학생들을 기숙사에 반드시 한 학기 입사시켜 새벽예배 훈련을 받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저 또한 기숙사에 입사하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선지동산에서의 새벽예배 훈련이 시작된 것입니다. 평생 해야 하는 것인데 그 첫 번째 발걸음이 신헉교 3학년 때 시작된 것입니다. 오전 5:30분이면 어김없이 방으로 당시 최고의 인기 복음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예수 사랑해요’등으로 대표되는 복음성가는 기계적으로 여지없이 신학생들의 새벽 단잠을 깨웠습니다. 학기 초, 이 음악은 천상의 음악이었습니다. 주의 종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선지동산에서 새벽지기로 훈련하는 은혜의 찬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흘러나오는 새벽 5:30분의 찬양은 학기가 진행되면서 은혜의 찬양이 아니라 지옥에서 노래하는 마귀들의 노래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잠이 가장 많을 때인 20대 중반의 몸을 자발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복음성가는 어느덧 가장 듣기가 거북한 지옥의 노래 소리로 변한 것입니다. 같은 방을 쓰던 동기가 하루는 이렇게 일어나면서 고통의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왜 새벽잠도 없으십니까? 새벽잠이 없으신 아버지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좀 주무시면 안 됩니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용케도 새벽 예배 시간에 3번의 결석 여유가 있어 2층 침대 위에 숨어 숨소리도 안 내고 숨어 있으면 귀산 같은 사감 목사님이 방으로 들어와 가지고 들어온 긴 막대기로 2층을 사정없이 쑤셔 넣으면서 이렇게 소리를 치셨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 예배로 하루를 시작해야지. 일어나.” 30여 년 전, 새벽잠에 취해 채플실로 개 끌려가듯 나가며 그렇게 어줍지 않게 시작했던 새벽 기도회가 이제는 목회 현장에서 일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목양의 현장이라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오십 중반을 바라보는 목회의 경륜이 있음에도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저는 아직도 힘이 듭니다. 오죽이나 못났으면 아직도 알람 소리를 의지해야 새벽이 일어나니 다른 말을 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렇듯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아직도 쉽지는 않지만 목회 25년의 소감이 있습니다. 새벽예배가 없었다면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었을까? 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찔합니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새벽예배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은혜는 새벽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양육 1기 사역에 임한 지체들이 제자대학 마지막 3학기의 코스워크인 새벽예배 훈련에 참여하여 코스워크를 무사히 끝냈습니다. 그런데 학기 생들 중 몇 명이 코스워크를 끝낸 뒤에도 새벽예배를 중단하지 않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본래 훈련의 목적에 부합하여 성장하고 있는 아낌없이 칭찬하고 싶은 고무적인 제자들입니다. 하루 동안 직장 생활과 삶의 현장에서 그들이 얼마나 많이 분주하게 일하며 수고하고 있는지 주의 종은 잘 압니다. 곤한 그 육체를 깨워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이 제가 신학교 시절, 기숙사 영성 훈련에 참여하여 시작한 새벽예배 훈련 때와 비교하면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은 육체의 수고를 동반할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나약하여 언제 쓰러질지는 모르겠지만 새벽의 소중함을 신앙의 여정 중에 느끼며 새벽을 깨우고 있는 제자들을 축복합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을 깨우는 새벽이슬 같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큰 함성으로 축복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