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중반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할 때‘세속도시’(The secular City)의 저자인‘하비 콕스’(Harvey Cox)를 처음으로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한 터라 당시 일반대학교 산하 신학대학원에서 만나는 학문의 내용들은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초청 강좌 강사로 온 신학자 하비 콕스였습니다. 통역이 없이 진행된 강의였기에 세밀한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지를 한탄했지만 강의에 집중하면서 겨우 얻어낸 것이 저에게는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정확한 언어의 해석인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제 귀에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교회에서 추구하는 영적인 부흥’이나'세속화'(secularization)는 상대 평가될 수없는 동일한 가치이다.”
‘교회의 영적 부흥’과‘세속화'를 같은 지렛대로 평가하다니!
당시 저에게는 이 말이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충격의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교회 안에서 몸담아 왔던 저 같은 자들에게는 두 개념의 비교 자체가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통해 익숙하게 몸에 밴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적인 신앙 색채에 길들여 있는 한국교회의 복음적인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하비 콕스의 지적은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콘텐츠였기 때문입니다. 결과론을 놓고 보면 당시 받은 충격으로 인해 하비콕스의 책들을 구입하여 섭렵하는 과정에 들어가면서 우물 안에 개구리의 신학적 지평을 갖고 있었던 저에게 소위 진보적인 신학적 스펙트럼을 공부하게 한 또 하나의 학문적 도전을 주었던 유익을 얻게 되었음에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후로 무슨 벼슬이나 한 양 진보적인 색채의 신학적인 맛이 든 저는 무슨 도를 터득이나 한 양 교만의 극치를 달리며 소위 보수적인 색채로 함몰되어 있었던 자들을 공격하는 볼썽사나운 무지를 드러냈던 가벼움의 시기가 씁쓸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론이 왜 이리 길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로 제 목회의 필드는 25년째로 들어섰습니다. 사역을 하며 3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 그리고 조금 더 연장을 하면 후반까지 보수적인 테두리 안에 함몰되어 있는 일반적인 전통 교회의 사역에 반대하며 저는 사역을 교회 밖으로의 진입이라는 나름의 고집을 고집해 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기존 교회의 거대한 조직과 싸웠고 전통적 매너리즘과 싸웠습니다. 여정 중 교회를 개척하는 지경에 이르며 교회의 이름을‘세상이 인정하는 교회’라는 목회철학을 나름 펼치기 위해‘세인교회’라 명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기총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썩은 냄새들에 대하여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교회세습에 대한 죄와 아픔을 보듬고 울었습니다. 대형교회들의 부분적 일탈을 놓고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정부 여당의 목소리를 담을 때는 교우들에게 과감하게 그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하비 콕스의 말대로 교회의 영적인 부흥과 맞물려 교회가 세속화의 영역에서 펼쳐야 할 일들에 대해서도 나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지천명의 연줄을 넘기면서 저는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본질을 주장하면서 세속 도시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놓치지 않으려고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근래 스멀대며 올라오는 혼돈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양의 현장에서 세속도시에 대한 사역이 정말로 본질인가? 대한 혼돈입니다. 어디 까지 인가? 에 대한 고통입니다.
지난 주 5월 15일 경향 신문 사설 3단에‘차별금지법안 제정으로 성소수자의 차별을 없애라’라는 제하의 글이 실렸습니다. 글의 내용은 마땅히 동성애자들에 대한 권익을 보호하는 것은 뒤로 더 이상을 미룰 수 없는 시대의 과업임을 천명하면서 이 일을 방해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극단적으로 표하면 사라져야 할 범죄 집단으로 촌필하며 교회를 말 그대로 글로 매장시키는 글이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보수 개신교회를 집단 악으로 규정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일간 신문사의 말없는 폭력에 유구무언이 되었습니다. 유구무언 정도가 아니라 좌절감과 측은함까지 여겨졌습니다. 사설의 이율배반은 참담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한국교회는 대화되지 않는 수구집단이고 배타적이라 그들의 논리는 무조건적으로 폄훼해도 좋은 무식한 자들의 반대를 위한 반대로 몰아붙였습니다. 적어도 한 나라의 최고의 지성의 농축물이라 할 수 있는 신문 사설의 공격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예의마저도 저버렸습니다. 저는 일간 신문을 경향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입니다. 동시에 보수집단에서 소위 빨갱이들만이 보는 저널이라고 공격하는‘시사인’을 구독하고 있는 목사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편협 된 성향으로 목회하는 목사가 되는 실수를 줄여보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목사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성경적 비판에 대한 해석도 당시의 컨텍스트가 말하고 있는‘삶의 정황’(Sitz im leben)에 대한 충분한 사색과 고찰을 근거로 해석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지성인의 도리요 나름 균형 잡힌 목사로서의 본분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나오는 사고의 다름은 인정되어야 그것이 인정되는 사회가 건강한 민주사회이며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며 저는 심지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고 믿고 있는 목사입니다.
사설은 말미에 아주 최고의 지적 수준의 표현으로 이렇게 한국교회에 대하여 너그럽게 가르치며 글을 맺었습니다.
“인간이 남녀,이성,동성으로 구분되기 전에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똑같은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길 기대한다.”
언론이 보는 인간학에 대한 정의에 대하여 가타부타 할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론이 보는 주장은 그들이 갖고 있는 철학이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묵과할 수 없는 그들의 천박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너그러운 자들이 왜 자기들의 이데올로기와 철학에 대해서는 양보 없이 주장하면서 교회만이 갖고 있는 교회만의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언론이 그렇듯 교회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만의 본질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마땅히 주장할 내용입니다. 그것이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교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공격하는 것이야 말로 언론이 자주 교회를 공격하며 사용하는 언어인 마녀사냥이요 천박한 자기들만의 인민재판이 아니겠습니까?
경향 신문이 이렇게 천박한 수준일 줄 알았다면 근처에 가지 말 것을 그랬나 봅니다. 나는 그래도 진보적 수준이 보수적 수준을 보듬을 줄 아는 아량이 있는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