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에 안수를 받았으니 목사가 된지도 이제 어언 2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치열한 영적 전쟁터인 현장에서 사역을 20년이 넘게 하면서 신학대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한 것을 하나 예로 든다면 바로 전술한 내용입니다. 성도들을 감성으로 섬길 것인가? 아니면 이성으로 섬길 것인가? 에 대한 제 문제입니다. 아직도 저는 현장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인 바 쉽게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목양의 현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굳이 대답하라고 강요한다면 나는 감성 쪽이 훨씬 다 가깝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고 싶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이 시대에 최고의 기독교 작가라고 불러지기에 주저하지 않는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자신의 책인‘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자신의 신앙적 성장 과정은“계속되는 질문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로마서 8:18절에서 바울이 말한‘생각하건대’의‘로기조마이’(logivzomai)의 지적 고민과 이성적 고민이 전제됨을 나 또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양의 현장에는 냉철한 이성과 지적인 분석만을 갖고는 접근할 수 없는 위대한 감성적 삶들이 녹록하게 진열되고 있음을 매일 경험하기에 이성적 토대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나의 목양의 초점이 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감사할 조건임을 고백합니다.
지난 금요일, 고수자 권사께서 교회 내의 연장자 교우들을 위해 저녁 식사를 배설하여 초대하는 섬김이 있었습니다. 당신도 고희를 넘긴 교회의 어른 대접을 받아야 할 연배이신데도 불구하고 더 나약한 교우들을 진정성을 갖고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 있다고 생색을 내는 그런 류의 섬김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섬김이었습니다. 종이 고 권사님을 9년 동안 섬겨왔습니다. 종이 보기에는 지난 9년, 이성적인 신앙의 연조로 달려왔던 흔적이 보이는 권사님이 금년 들어 감성적인 신앙의 보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 보여 너무 종은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아들 벌이 되는 교회 지체의 결혼식에 축가를 부르기 위해 빨간색 투피스를 입고 나오시며 주책이라고 수줍어하시던 권사님의 모습은 아직도 소녀 같은 감성이 자욱합니다. 전술했듯이 같이 대접과 섬김을 받을 연배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힘을 쓰며 교회 섬기고 있는 연장자들을 섬기시는 헌신은 이성만으로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감성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언제까지 종이 고 권사님을 섬기며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실 지는 모르겠지만 후회하지 않게 권사님을 하나님 나라에 합한 딸로 올려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것이 종의 고백입니다. 권사님이 해맑은 웃음소리는 우리 교회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남은여생, 고 권사님이 더 감성적인 면에서 기쁘고 감사한 여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권사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섬김에 동역하신 권사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