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어머님의 소천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저를 보고 세상에 이런 불효막심한 아들을 보았는가? 하고 저를 비난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새벽에 드리는 제목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 어머님을 품에 안으셨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지난 주 중에 어머님이 입원하고 계신 인천 YWCA 요양 병동에 다녀왔습니다. 아버님과 사별하신 지가 3년이 되어가는 데 어머님께서 그 때 즈음 치매 증상을 보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게 발병이 된 지 3년여 동안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셨고 더 이상은 가정에서 모실 수 있는 상황의 한계를 넘어서서 요양병원으로 모시기로 가족들이 동의하였고 이제 어머님께서 병원 생활을 하신 지도 어언 9개월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목회를 한다는 핑계로 제대로 병문안도 못 드리는 최고의 불효자이기에 옆에서 어머님을 봉양하며 수종 들고 있는 누님과 형님들에게 머리를 들을 수가 없는 송구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동기간의 미안함은 차선이라고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어머님의 고생하심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것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막내아들을 바라보시면서 누구시냐고 물으시는 어머님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미여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휠체어로 거동을 하시지만 요양보호사가 늘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들을 표현하실 수 없는 혼자만의 생활을 자식 된 자가 생각을 하면 심장 박동 소리가 빨라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죄책감입니다. 큰 형님은 사업터에서 집까지 가는 노정에 어머님이 입원하고 계시는 요양병원을 거쳐야 하는데 어느 경우 병원을 들리지 못할 때는 병원을 우회하여 집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어서 어머님의 마음에 불효한 일들이 너무나 죄스러워 감히 병원 앞을 지나지 못하는 형님의 마음이 애틋하여 동생인 제가 울컥해 집니다. 지난 주 인천에 가서 어머님을 평생 수발하고 있는 누님과 오랜만에 교제를 했습니다. 이제 환갑이 된 누님은 정말로 남동생들인 저의 형제들이 업어주어야 하는 보석 같은 누님입니다. 누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머님의 말년을 이토록 태평하게 아들 된 자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누님을 향한 감사의 고백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목사이기에 정말로 참람할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어머님의 영육의 부르심입니다. 이미 먼저 가셔서 사랑하는 아내를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께서도 아마 어머님이 이 땅에서의 수고를 마치고 주의 품에 안기시기를 중보하실 것 같습니다. 종과 같은 아들을 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을 향한 자식들의 마음 중에 공통분모가 있다면 아마도 가슴으로 쓰는 사모곡일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설명 불가능의 사모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불효를 각오하고 어머님을 위한 기도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어머님의 영육을 귀하고 아름답게 부르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데 눈이 충혈 되는 것은 어찌 이 종만의 현상이겠습니까?
어머님, 결코 잊어지지 않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파송하신 유일한 언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