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후보생으로 선지 동산에서 공부를 할 때 교수님들을 통하여 들었던 참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면서 그 때 말씀하셨던 교수님들의 일침들이 어찌 그렇게 새록새록 다가오는지 놀랍습니다. “목양의 현장에서 주께서 위탁한 양들은 사랑의 대상이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던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포함한 많은 목회자들이 알면서도 가장 쉽게 놓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선배 교수님들과 목사님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보배 같은 이 진리는 사람이 변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것입니다. 집중 훈련 때 강사를 통해 들은 이야기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행주가 되지 않는다.” 바탕이 좋아야 함을 역설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목회가 무엇인가? 를 논하자면 이 무모함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걸레 같은 자아를 갖고 있는 자연인들을 행주 같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과정이 바로 목회임이 분명합니다. 아, 이 대목에서 지난 23년 동안 목양의 여정 중에 배웠던 것 하나를 육비에 새겨놓고 있습니다. 저 또한 참 많은 시행착오를 했던 부분인데 이제는 어렴풋이 다가선 은혜입니다. 이름뿐인 허울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성숙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나의 몫이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몫이라는 보석 같은 교훈 말입니다. 지난 주간, 제자대학 1학기에 소속되어 있는 20여명 지체들이 제출한 ‘나의 신앙 간증서’를 세심히 읽어보았습니다. 읽으면서 영적인 틈새로 인해 느끼는 주의 종으로서의 자괴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훈련생들의 공통분모를 발견했습니다. 목회자인 저에게는 아주 큰 보람이요, 위로가 되는 공통분모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조금은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는데 도전이 될 것 같아 기록해 봅니다. “가짜에서 진짜로 가는 홍역 앓이 중” 저는 이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21세기는 사상의 획일화를 반대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라고 정의합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을 획일화의 작업이라고 폄훼하는 일련의 사탄적 사상이 무섭게 공격하고 있는 시대가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공격에 참패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이런 공격과 넘어짐은 그 날을 향하여 가는 당연한 결과들일 수 있다고 저 또한 인정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짜를 고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짜에서 가짜로 신앙의 정지에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가짜에서 진짜로 꺼풀을 벗는 과정을 겪고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지체들에게 산고의 고통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진짜 그리스도인들로 가는 노정의 홍역은 진정한 축복과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제자대학 강의 중 나눔의 시간에 닞 반의 한 자매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이제 정말 우리들을 낭떠러지 끝까지 몰고 왔고 가차 없이 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정확한 자매의 혜안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최선을 다해 떨어뜨리려는 사림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대학 지체들의 간증문을 읽으면서 내심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떨어뜨리겠노라” 힘차게 밀 것입니다. 낭떠러지 밑으로 인정사정없이. 그래야 비로소 양육의 과정에 있는 지체들이 진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나에게 주님의 은혜라는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 주일은 한 명을 더 떨어뜨려야 할 텐데. 누구를 밀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