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참된 예배이다
존 맥아더 1. 서론 요한복음 4장 20-24절이 예배에 대한 연구의 중심 본문이 될 것이다. 예배에 관련하여 연구해 나감에 있어서 가끔 우리는 이 구절로 다시 돌아와 이 구절을 더 깊게 고찰할 것이다. 나는 요한복음 4장 20-24절이 신약성경에서 예배라는 주제를 다룬 가장 중요한 성구(聖句)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의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주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간의 대화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니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0-24). 본문에서 "예배"란 단어가 아홉 번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신문의 교회 집회 광고난(미국에서는 주말 신문의 교회 난에 집회 광고가 나감 - 역자 주)을 통해 그 주일에 어느 교회에서 누가 특송(찬양)을 하는가만을 훑어 보며,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해주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 자, 만일 당신이 음악으로부터 얻을 수있는 무엇을 찾아 교회에 나간다면, 또는 설교에서 무엇을 받으려고,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음악이나 설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당신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는 자극일 뿐이다. 당신이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뤄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나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찬양을 드리면 그분의 은혜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셨으므로 드리는 것에 축복이 있다. 이와 같이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갈 때에 당신은 예배를 드리는가? 예배를 드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예배를 드릴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당신이 옷을 입을 때나 교회로 가는 차 안에서 당신의 마음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는가? 지금까지 당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가? 만일 없다면, 나는 이 예배 연구에서 당신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당신이 앞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목적하는 것은 우선 당신이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고, 둘째로는 당신이 정당하게 정의된 개념에 따라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며, 세째로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제 그렇게 하겠느냐고 당신에게 촉구를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는 처신을 하는 것이 된다. 나는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든지 그렇지 않든지의 대안 밖에는 없는 구석으로 당신을 몰고 가서, 당신이 이제까지 영위해 온 종교생활의 실상을 파악하게 할 것이다. 1. 예배에 대한 정의 예배란 과연 무엇인가? 잘 알려질 정의(定義)는 "예배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게 돌리는 존경심"이다. 그것은 "더 높은 존재에게 경의(敬意), 존경, 숭배, 존중, 찬양, 찬사, 또는 영광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예배"란 단어는 우상이나 물질적인 것들이나 참 하나님께 돌려진 존경심을 언급하는 데에 다같이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 단어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단어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게 드려진 경의(敬意)를 나타낼 뿐이다. 신약성경(헬라어)에서 "예배"란 말을 표기할 때 "...을 향하여 입맞추다, 손에 입맞추다, 절하여 숙이다, 엎드리다" 등을 의미하는 「프로스큐네오」(proskuneo)를 자주 사용한다. 예배의 개념은 상전 앞에서 존경과 경의, 경배, 숭앙의 뜻으로 엎드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이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하며 존경과 숭앙의 뜻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의 절대적 속성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 그렇다면 예배는 본질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일에 함께 모이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우리는 설교자나 성가대에 앉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모인 것이다. 설교와 성가는 다만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켜 주는 자극일 뿐이다. 따라서, 당신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예컨대 "축복"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면 그것은 동기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면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에 맞추어져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려는 타는 듯한 열망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과 마음의 태도와 우리의 소유를 드리는 것까지 포함한다. 2. 참된 예배의 모습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의 예배의 개념에 대한 실례를 들어 보겠다. 성막에서의 향의 향기 출애굽기 30장 34-38절은 예배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막에서 어떻게 예배가 드려져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지시를 하신다. 그 지시된 것들 중의 많은 것은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교육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30장 34-38절에 묘사된 그런 교육 수단으로 사용된 것들 중의 한 가지가 예배에 있어서 놀라운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즉, 독특하게 구별되어 다른 어떤 요소로도 영향받지 않게)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34-36). 실제로 향긋한 냄새가 나는 이 향은 성막 안에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해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37-38절은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말한다. 당신은 성경에 향의 제조법이 제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아마도 그 향은 가장 좋은 향기를 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그 향을 만들면 목숨을 잃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향이 하나님의 코로 올라갔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로만 올라가는 독특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배란 개인의 마음에서부터 바로 하나님의 코로 올라가는 독특하고도 성별(聖別)된 거룩한 행위임을 보여 주는 훌륭한 예배의 모습이다. 마리아의 향유의 향기 성막에서 향의 향기가 하나님의 코로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를 의미했다. 요한복음 12장에 또하나의 향기로운 예물이 예배로서 드려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의 형태로 살아계신 하나님,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것이 드려졌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1-3). 마리아는 더럽고 먼지가 묻어 있는 예수의 발을 씻기 위해 그녀의 영광인 머리털(고전 11:15 참조)을 사용했다. 또 마리아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약 1년간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의 값비싼 향유를 사용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이다. 예배는 곧 자기를 낮추는 것이며, 드림에 있어서 아낌이 없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달랐다. 마르다는 늘 봉사했었고, 마리아는 항상 예수의 발 밑에 앉아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전에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마르다의 섬기는 것보다 좋다고 말씀하셨다(눅 10:38-42 참조). 그러나, 유다는 마리아가 향유를 갖고서 한 일을 보고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했다. 6절은 유다가 정말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 돈은 다만 자기를 위해서 필요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를 가만두어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7-8절)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구제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형제에게 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마르다의 계열에 속해 있다. 즉, 항상 바쁘다. 우리의 교회들은 모든 프로그램과 활동들로 조화롭게 체계가 잡혀 있다. 또 우리는 아주 신중을 기하여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 심지어 너무 신중하여 하나님께 드리는데에도, 1년 치의 수입을 다 쏟아 붓고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기기는커녕 아주 신중하게 주팔 알을 튕기려고 한다. 마리아의 행동은 참된 예배의 행위였다. 그녀가 드린 향유에서 향기가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의 실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구제나 종교적행사보다 낫다. 물론 구제나 종교적 행사도 좋은 것이고 필요하지만 예배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3. 구별된 예배 나는 봉사와 예배를 서로 비교하는 것이 참된 예배가 정말로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봉사는 성부(聖父)께로부터 나와서 성자(聖子)를 통하여 성령(聖靈)의 능력으로써 영적인 은사의 형태로 각 개인에게 내려온 것이다. 반면에 예배는 우리에게서 성령(聖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자(聖子)를 통하여 성부(聖父)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봉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로 내려온 것인 반면에, 예배는 우리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와 예배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르다처럼 너무 봉사 지향적이지만, 충분한 만큼의 예배 지향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예수의 발 밑에 앉아 예수께 예배드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라.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나의 신앙 생활에서 예배가 으뜸이 되고 있는가? 나는 성실하게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 나의 전심(全心)을 담은 예배를 드리는가? 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갈급한 열망으로 불붙어 있어서, 예배를 드리려고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속으로서둘러서 들어가는가?"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찾으신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다음에 언급되는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예배의 실체를 규명해 나가도록 하자. 2. 예배의 중요성 요한복음 4장 23절은 아버지(성부)께서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 때문에 예배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예배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救贖) 계획의 목표로 삼으신다. 예배는 성경 전체의 강조점이다 예배가 중요한 첫번째 이유는 성경이 아주 빈번하게 예배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에 관한 주제를 수백 번 강조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개의 성구(聖句)들을 선택하였다. 1. 구약의 성구(聖句)들 제 1계명의 강조점(출 20장) 하나님께서 계명과 성문법과 규례와 율법과 율례 등의 형태로 어떤 기준들과 원칙과 방법 등을 세우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께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분이 주신 제 1계명을 주의해서 보라.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2-6). 제 1계명의 강조점은 하나님을,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으뜸가는 책무이다(출 34:14/마 22:37 참조). 성막의 건립(출 25장)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셔서 그들이 광야 생활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이 당신께 예배드리는 것에 그들의 삶의 목적을 두기를 원하셔서 예배 처소를 세우셨으니, 그것이 곧 성막이다. 하나님께서 이 예배 처소를 얼마나 중시하셨는지를 알려면, 하나님께서 전체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시는 데에는 성경의 총 31절만을 할애하셨지만, 성막의 일부분이 될 기구들의 중수와 칫수들을 설명하시는데에는 성경의 일곱 장(총 243절)을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성막 그 자체는 별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성소의 제일 안쪽인 지성소(至聖所)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언약궤 위는 시은좌(施恩座)로서,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서 피를 뿌리는 곳이었다. 이 시은좌가 바로 하나님의 「쉐키나」(Shekinah)의 영광이 거하시는(장막을 치는 : tabernacled) 곳이다. 출애굽기 25장 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예배의 중심지로 성막을 그들에게 주셨다. 성막 주위에 진을 침(민 1:52-2: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생활 동안에 그들이 어떻게진을 쳐야 하는지를 정해 주신 것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을 멈추고 진을 칠 때마다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그 다음에는 레위 지파이고, 그 밖으로 열 두 지파들이 주위에 진을 쳤다. 제사장들은 예배를 담당했고, 레위인들은 성막에서 수종드는 일을 맡았다. 여기서도 예배에 최우선권이 주어진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사장이 되기 위한 연령 제한에서도 이것이 나타난다. 남자의 나이 20세가 되어서야 군에 복무할 수 있었다(민 1:3). 레위인 남자는 2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민 8:24). 그러나, 그가 제사장이 될 수 있으려면 30세가 되어야 했다(민 4:3). 왜 제사장은 30세가 되어야 그 직을 맡을 수 있었는가'? 왜냐하면 예배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예배에 가장 큰 책임이 따르기에 가장 높은 정도의 영적인 성숙도가 요구되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병사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이 있었고, 성막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또다른 정도의 기준이 있었지만,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최고의 수준이 요구되었다. 스랍들의 경우(사 6:1-2) 이사야는 이사야서 6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네 날개는 예배와 관계되었고, 두 날개만이 봉사에 관계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쳐다볼 수 없어서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로 인하여 자기들의 발을 가리었으며, 나머지 두 날개로는 봉사하고 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도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시편 기자의 권고(시 95:6-7) 시편 95편 6-7절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권하는 많은 시편들 중의 하나이다(시 5:7/29:2/45:11/66:4/86:9/96:9/99:5, 9/132:7/138:2 참조) 2. 신약의 성구(聖句)들 로마서 12장 1-2절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 열 한 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과 그분의 구속(救贖) 목적, 세상에 대한 계획, 죄인을 향하신 자비 등에 대하여 말하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앞의 열 한 장의 모든 진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받으시는 : acceptable)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리스도인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유익에 관해 진술하는 1-11장의 내용을 기술한 다음에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너희에게서 무엇인가 원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그것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이다. "기뻐하시는"(받으시는)이란 단어는 제사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드려야 한다. 이 단어는 2절 끝 부분에서도 언급된다.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원하신다. 그것은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런데 그 몸이란 단지 물질적인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육체만을 가리킬 경우에는 그것이 영적인 예배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절에서 말하는 "몸"이란 전인격(全人格), 참 자아(自我)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에 대하여 그분은 우리 사신을 영적인 예배의 행위로 당신께 드리기를 요구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이 기뻐하시는(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5절 베드로전서 1장은 구속(救贖)의 은혜의 놀라움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절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관해서, 18절은 우리의 신생(新生)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2장의 2-3절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갓난 아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2장 5절은 구원받은 자들로서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벽돌과 시멘트 반죽을 가지고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산 돌인 자신의 백성들로 이뤄진 집에 거하신다. 또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되고 영적인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의 기초 위에서 드려진다. 우리는 왜 예배가 중요한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성경전체가 예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배가 운명을 결정한다 예배는 삶에서 부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삶의 핵심이다. 당신도 아는바와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영생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간다. 그럴진대 예배는 바로 삶의 핵심인 것이다. 영원한 세계는 그 사람의 예배의 성격에 따라서 결정된다. 예배는 두 가지로만 드려질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이다. 성경은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종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예배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곧,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이다. 1.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거짓 신(神)들에 대한 예배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신(神)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나무랄 수없지 않은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예배에 성실하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들의 예배를 받아 주실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게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신(神)에게의 예배를 묵과하지 않으신다(출 34:14/사 48:11 참조). 세상은 거짓 신들에게 예배한다. 로마서 1장을 보라. 21절 상반절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며"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거나 그분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와 존귀와 찬사를 드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거절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도 없으므로 저희를 "더러움"(롬 1:24)과 "부끄러운 욕심"(롬 1:26)에 내어버려 두셨고, 궁극적으로는 심판을 당하도록 버려 두셨다(롬 1:32). 사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거절했을 때, 그들은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형상"(롬 1:23)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우상에게로 돌아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거절할 때,그들은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 신(神)들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이 거짓 신(神)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세상의 물질적 신들 세상(世上)의 물질적 신(神)의 한 가지 예(例)는 부(富)의 신이다. 이것은 욥기 31장 24-28절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 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달리 말하면, 내가 내 소유(재물)를 예배하거나 내가 몸담은 작은 세상을 예배하거나 내 손에 입맞추고 돌아다닌다면 하나님을 부인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으며, 물질적인 세상의 신(神)들에게 예배하고 있다. - 천상(天上)의 초자연적인 신들 신명기 4장 14-19절이 이런 예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모세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내린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형태나 모습이나 형상을)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격하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의자에 앉아 있는 수염이 난 노인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상이란 우상을 만드는 망치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잘못된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잘못된 형태로 만들어 버린다. 망치와 끌을 잡고 나무에서 신(神)을 만들어 내는 우상 숭배자는 그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신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형상으로 격하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지 않는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첫번째 종류의 예배는 거짓 신(神)에 대한 예배이며, 이것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정죄되고 있다 나는 이사야서 2장 6-10절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여기서는 이사야가 그의 백성들 중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즉, 그들이 이방인들과 이방 신(神)들이 그들의 사고와 예배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천한 자(문자적으로는, 일반 백성들)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했는데, 그들은 심지어 태양까지도예배하였다(겔 8:16). 이방인들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어느 것에게나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모든 종교는 거짓 신(神)들에게 예배한다. 모든 유물론자들과 비종교적인 무신론자들과, 종교에의 눈을 닫지 않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 역시 비록 대상이 자신일지라도 자기가 고안해 낸 어떤 물질적인 신(神)들을 예배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파멸로 이끌어 간다. 참 하나님께 그릇된 형태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거짓 신(神)들에게 드려진 예배도 받지 않으시지만, 참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라 해도 잘못된 방법으로 드려지면 받지 않으신다. 그것은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관하여 아주 자세하게 그 방법과 양식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 하나님에 대해 그릇된 형태로 드려진 예배의 실례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발견된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 있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백성들은 아론의 지도하에 그들의 모든 금붙이들을 모아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그것을 예배하기로 했다. 그들이 다른 신(神)에게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었다. 금송아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던 바의 표현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와서 그들의 소행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하여 계명이 기록되어 있던 두 개의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 버렸다(19절).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진노를 발하셔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10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므로(14절) 삼천 명만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28절).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드려진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이나 물질적인 표현으로나 우상 등, 어느 것으로든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종종 사람들이 "나는 나의 소견에 좋을 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 내린 정의(定義)가 성경과 맞지 않는다면, 당신의 그 정의를 참 하나님과 동일시 여긴다 해도 당신의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세번째 경우의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자. 참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예배하는 것 하나님을 어떤 우상이나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도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예배의 행위에 있어서도 어떤 개인의 생각으로 격하시켜 드리는 것 또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제 자기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람들의 몇몇 사례(事例)를 성경에서 찾아봄으로써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겠다. - 나답과 아비후(레 10:1-2) 대제사장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맡은 나답과 아비후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레위기 10장 1절은 그들이 제사장직에 임직되던 중요한 그 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 날은 그들이 백성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게 된, 사실상의 직무 첫날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향으로 채워져서 그 향기가 하나님의 코로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를 상징한다)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아마도 레위기 10장 9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하시는 엄중한 경고는 나답과 아비후가 분명히 술에 취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같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는 취한 채 성막 안에 들어가서 어리석은 짓을 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또한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의 조항과 맞지 않는 일들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로 삼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나름의 사고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되고, 성경에 규정된 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 사울(삼상 13:8-14) 사무엘상 13장에 보면 사울 왕은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다. 8-9절에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 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신은 "그게 뭐가 그리 나쁜 일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 제사장 이외에는 아무라도 제단에서 섬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울은 자신의 권세와 신임성을 백성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제사장의 직무를 범한 것이다. 10-14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의 예배만을 받으신다. 사울이 자기 방식대로 드린예배 때문에 다시는 사울의 계통에서 왕위(王位)에 오른 자가 없었다. - 웃사(삼하 6:1-9) 웃사는 언약궤의 운반을 맡은 고핫 자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고핫 자손들은 어릴 때부터 언약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가만을 배우면서 자라났다.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언약궤는 손으로 만져져서는 결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언약궤의 옆면에는 큰 고리들이 달려 있어서 고핫 자손들이 거기에다 막대기를 꿰어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언약궤가 항상 운반되어야 하는 방법이었고, 웃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웃사는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방법으로 언약궤를 운반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웃사는 무례하게도 언약궤를 수레에 실었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실수였다. 하나님은 그 의도가 아무리 좋더라도 인간의 자기 나름대로의 즉흥적인 방법으로 섬겨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언약궤가 수레로 운반되고 있을 때(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어난 일을 6-7절이 설명해 준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 한 것같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당신도 알 수 있듯이 웃사는 할 바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가 살아오는 동안에 결코 언약궤를 만지지 말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참 하나님을 인간 자신의 방법대로 섬겨서는 안 된다. -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참 하나님을 하나님의 계명과 기준대로가 아니라, 자기들 나름의 체계대로, 사기들이 고안해 낸 대로 섬겼다. a. 마태복음 15장 1-9절 :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즉 전통적인 씻는 규례대로)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1-3절). 당신도 알다시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유전(tradition)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이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예배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체계를 고안해 냈다. 4-6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유전(전통)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례를 보여 주신다 그 다음으로 7-9절에서는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이 사람들의 유전(전통)으로 대치된 많은 교회들에서 자행되어지고 있는 모든 거룩한 속임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께는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드려야지 상상(想像)이나 관습이나 종교 의식(儀式)으로 드려서는 안된다. b. 마태복음 23장 23-28절 :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바리새인들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고발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거짓 신(神)들에게 예배해서도 안 되고, 참 하나님을 잘못된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거나, 참 하나님을 자신의 방법대로 섬겨서도 안 된다. 예배는 성경의 규정대로 드려야 한다. 이제 네번째로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예배는 다음과 같다. 참 하나님께 잘못된 태도로 드리는 예배 우리가 모든 거짓 신(神)들과 참 하나님에 대한 모든 형상(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과, 자기 방식대로의 모든 예배의 형식들을 치워 버린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의 태도가 옳지 않다면 그 예배는 열납되지(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열납될 수 없는 예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 중에서는 거의 아무도 거짓 신(神)들에게나, 또는 참 하나님에 대한 어떤 형상에게 예배드리지는 않는다. 또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들의 방식을 고안해 내지도 않는다. 우리는 성경대로 예배를 드리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올바른 태도로 예배에 임하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를 제시해 주는 몇몇 성구(聖句)들을 제시하겠다. - 말라기 1장 6-14절, 3장 13-15절, 4장 1-6절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을 고발한다. 이 충격적인 예언에서 말라기는 그들이 범한 악한 죄 일곱 가지를 지적한다. 그러한 죄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잘못된 태도로 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예배활동에 참석할 뿐이지,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말라기의 고발(1:6-7)을 들어보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또는 제단)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그들이 무슨 일을 자행하고 있었는지 아는가? 그들은 예배를 경멸히 여겼다. 예배는 그들에게 있어서 의식(儀式)이었고, 판에 박힌 일이었으며, 습관일 뿐이었다. 이 예배에는 그들의 마음이 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최하의 것을 드렸다. 그러나, 그들을 정죄하기에 앞서, 나는 당신에게 어떤 잘못된 태도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예배를 경멸하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러면 그들의 소행은 무엇이었던가? 8절은 그들이 눈이 먼 것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고 말해 준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에게는 눈먼 것이 쓸모가 없어서 그것을 제물로 드리려고 가져온 것이다. 눈이 먼 짐승은 먹을 것을 찾는 데 많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여하튼 결국에는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백성들은 그것들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치워버리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눈이 멀게 된 것은 어떤 질병 때문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또한 병든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는 단지 자신들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 뿐이다. 계속해서 8-9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너희가 ...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다시 말하면, "너희가 이같이 하나님을 대우했으니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떻게 대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대우한 것보다 더 낫게 너희를 대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그런 다음 10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다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으니, 물질적인 방법으로 드리는 것,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드리는 것,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11절은 계속하여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 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깨끗한 제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어린 양한 마리를 희생 제물로 드리려면 그 양은 떼 중에서 가장 좋은 양으로서 흠과 점이 없는 것이라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12-14절을 살펴보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산은 더러웠고 그 위의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가 제사장들을 먼저 고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제사장들이 그 죄를 짓는 데 앞장을 섰었다. 그러나, 그 죄는 백성들에게로 침투해 내려갔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계층이 부패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상(제단)을 더러운 것으로 여겼다. 중요한 것은 13절에 "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에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배드리는 모든 것이 그들 목의 큰 통증과 같았다. 아마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 또 거기 가서 예배드려야 한다니 ... 좋다. 어차피 쓸모없는 것들이니까 저 눈먼 양이나 절름발이 양을 이번 기회에 치워버리자." 그들은 형식과 형태는 갖추었지만, 마음이 거기에 담겨 있지 않았다. 거기에 실체가 없었다. 3장에서 그들의 정도는 더 심해진다. 13-14절에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악한 말을 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예배드리는 것이 유익이 없으므로 여호와를 섬기는 데 돈을 충분히 들이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는 예배를 드린 결과가 4장 1절과 3절에 기록되어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당신은 올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가? 앞의 말라기의 예(例)는 하나님의 백성이 참 하나님께 종교적 격식을 갖추어서는 드리나, 잘못된 태도로 예배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예배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 이제 당신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 당신을 "글쎄요, 나는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격하시키지도 않았고, 예배에 대해서 내 자신의 방법을 만들어 낸 일도 없고, 거짓 신(神)들을 섬기는 어리석은 일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그분의 표준대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해 보겠다. 당신이 예배를 드릴 때 당신의 전심(全心)을 기울이는가? 헌금할 순서가 되었을 때 당신은 당신에게 있는 것에서 최선을 다하여 드리는가? 당신이 하나님께 서원을 드릴 때 당신은 하나님의 아낌없는 풍성하심에 따라 서원을 드리는가? 당신의 마음은 존경심과 경외심으로 충만해 있는가? 당신의 마음 자세가 옳지 못하다면 당신의 예배는 무의미한, 열납될 수 없는 예배인 것이다. - 아모스 5장 21-27절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즉, 내가 너희 예배를 견디지 못하겠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찐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21-22절)고 말씀하셨다. 이제 여기서는 좋을 짐승들도 드려졌다. 그들이 겉으로는 올바르게 예배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23-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잘 아노니, 한편으로는 내게 나아와 희생 제사를 드리나 곧바로 돌이켜서 거짓 신(神)들을 섬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