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서평] 십자가의 도(道)-승리의 구심점2024-03-25 15:56
작성자 Level 10

십자가의 도

제씨 펜 루이스 지음/이현수 옮김

두란노/2000년 5월/159쪽/5,000원

 

1. 십자가의 중심성

갈보리 십자가야말로 핵심 없는 이 시대에 참된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 주는 유일한 구심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인류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이 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데 있어서 그 모든 면에서 중심축 역할을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올바른 관점과 균형을 잃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는 이유는 바로 이 십자가의 구심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체험하기 위하여 진리의 유일한 구심점인 십자가 주변으로 모여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성령님은 이 십자가라는 구심점을 통해 신앙 생활과 관계된 다른 깊은 진리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 것이다.

 

십자가는 (1)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으며 (2)갈보리에서 하나님은 원수되었던 죄인들과 화목을 이루셨고 (3)주님은 갈보리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이다

로마서 6장에 나타난 십자가의 진리는 얼마나 명백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십자가였다. 왜 그런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 곧 ‘옛사람’은 완전히 부패되고 타락되어 있었다. 뱀이 준 독소를 받아들임으로써 근본적인 뿌리는 물론 그 나무 전체가 썩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은, 그가 다시 시작하셔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셔야 하는 재창조의 진리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의 옛 아담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완전히 허물어지고 무너져 내린 토대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생명력을 불러일으키거나 새롭게 할 수 있는 근거도, 가능성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이다

우리 안에 세상을 향하여 죽는 경험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진정으로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십자가의 진리가 실제적으로 적용된 성도들만이 세상과의 ‘분단’을 경험하게 될 것이요, 마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듯한 세상과의 ‘격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함으로 이미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이제 주 안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굳게 지키고 세상으로 나가 세상에 속한 영혼들을 접할 때 그들의 어려움을 돌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육신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십자가의 진리의 사실을 믿는 성도들은 ‘육신의 정욕’과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 ‘육신’과 ‘성령’ 사이에는 치열한 투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육신’과 ‘성령’이 본질적으로 상반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를 지배할 때 육신의 정욕은 사라진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해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 ‘육’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비밀을 계시해 준다. 즉, ‘육신’은 단지 정지해 있거나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버릇’과 ‘습관’ 그리고 육신에 속한 모든 정욕과 욕심을 모두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

 

십자가는 사탄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이다

마귀와 그의 모든 권세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현시대에 사탄이 행하는 모든 일들과 또 그의 허위적인 세력이 이 세상에서 팽창되는 것을 보고 실망하는 성도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갈보리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우리는 심령에 참 안식을 얻고, 생활 속에서 전개되는 영적 전쟁에 승리하고 인내할 수 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승리했다고 소리치던 바로 그때에, 주님은 마귀와 그의 모든 권세를 “벗겨 버려 부끄럽게 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통쾌하게 승리하셨다!

 

십자가의 중심성

마비(Mabie) 박사는 십자가의 중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우주의 신비를 열며, 모든 우주의 비밀을 풀며, 모든 것을 화목시키는 열쇠로 인식되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울에게 주어진 것은 그를 통해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서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 안의 모든 문제와 비밀을 푸는 유일한 열쇠인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야 한다.

 

2. 십자가와 변화된 중심

“나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의 죽음에 동참하게 되었고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나의 중심은 십자가를 통해 바뀌어졌다. 이제 나의 새로운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력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를 주장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그의 생명샘에서 마치 폭포수같이 넘쳐 나와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너희들이 육적으로 판단하는 것같이 단순한 열심이나 순간적인 열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 나타난 바울의 말씀은 십자가의 도의 참된 의미를 성도들에게 밝히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잘 나타낸 말씀인가! 십자가의 내적인 진리는 결코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너무나 위대하고 두려울 정도로 실제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그 죽음의 실재에 동참한 자만이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진리를 우리 안에 계시하실 때 단순한 지식적인 이해를 초월하여 우리의 삶 속에 전개되는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나타내신다.

 

첫째, ‘자아’(ego)의 중심이 바뀐다.

둘째, 인격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인격의 재창조가 일어난다.

셋째,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것은 이미 끝장나고 완료된다.

넷째, 우리의 육이 계속적으로 십자가에 넘겨져 지속적인 죽임을 당함으로써 육신의 행위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처리 받는다.

다섯째, 우리의 ‘변화된 중심’에서부터 외부적인 육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지속적으로 동참한다.

 

3. 십자가와 변화된 가치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4-16)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변화된 중심의 결과를 볼 수 있다. ‘나’라는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가치관 역시 함께 변화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이제 우리는 아무도 육신적인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낡은 옛사람의 관점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이었던 우리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 아래 말 한마디마저도 주님이 주시도록 의지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물론 우리의 모든 언행까지도 ‘혁명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정말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나’는 십자가에 못박아 처분해 버리고 성령께서 주님의 형상을 닮은 새로운 인격체로 재창조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온전히 맡겨 드릴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4. 십자가의 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 24-26)

 

주님께서는 자연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있듯이 영계에 속한 영적인 한 법칙이 있음을 암시하고 계시다. 열매를 맺기 위해 죽는 점차적이고 진행적인 죽음의 법칙을 계시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맺기 위해 본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연적이요, 필수적이었던 옛사람의 ‘생명’을 버리라고 하신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명은 필수적으로 죽어야 한다!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영의 자유함, (2)이어서 지, 정, 의와 관련된 우리의 인격, 곧 혼을 다루며, (3) 마지막으로 육을 다스리는 영역까지 십자가가 영향을 미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속적인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런 순서로만 역사하시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주님은 각 성도들이 처한 환경과 신앙 수준에 알맞게 갖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에 박힌 것 같은 한 종류의 신앙 체험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는 먼저 죄에 대한 승리를 우리 안에 경험케 하신다. 그리고 본능적인 감정과 복잡한 지성의 모든 혼적인 활동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원하신다. 성령님은 갖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같이 순종하며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종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회피하려 한다. 그들은 열매를 맺기는 원하지만, ‘열매를 맺기 위한 십자가의 길’은 걸어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앙 생활 가운데 느낄 수 있고 의식할 수 있는 혼적인 생명만을 갈망하고, 의식할 수 없는 영적인 경험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기초로 한 영적인 삶만이 ‘굴곡’이 없다는 사실이다. 옛사람의 본성적인 생명은 십자가의 죽음에 깊이 파묻혀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자유롭게 운행하심으로써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십자가의 길을 깨달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 여하에 따라 역사하신다. 다음과 같이 고백해 보자. “주님, 저는 그 길을 선택합니다! 또 주님이 그 십자가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저는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나의 ‘생명’을 포기합니다!” 이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진정 이 십자가의 길로 들어설 때, 주님은 우리를 “영생하도록 보존하실 것이다.”

 

“주님은 먼저 이 땅에 오셨고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도 죽음을 가져오셨습니다. 또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변화된 인격과 중심 안에 오셔서 다시 한번 사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 주님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던 그 생명과 영이 우리 안에 똑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십자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만일 여러분의 대답이 “예”라면 이제 성령께서 여러분을 전적으로 주관하시도록, 또 여러분의 환경을 통해 성령의 방법대로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도록 조용히 맡기는 기도를 하라!

 

마지막으로 나의 경험을 간증하고자 한다. 내가 이 십자가의 도를 처음 깨달은 것은 하나님 앞에 헌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시 나는 영적인 어린 아기와도 같았다. 그때 나는 주님이 나를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고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체험을 했다. 그리고 그 기쁨의 감격에 못 이겨 나는 소리쳤다. “오! 주님, 이 기쁨은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때 나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었다. “네가 만일 500명을 구원하는 데 나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 기쁨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느냐?” 그리고 주님이 다시 물으셨다. “너는 너를 피곤케 만드는 감성적인 기쁨을 떠나서 내가 너의 전체를 가질 수 있도록 너를 포기할 수 있느냐? 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도록 네 자신을 맡길 수 있느냐?” 주님의 이러한 질문 앞에 나는 주님의 제의가 너무나 합당하다고 생각했고, 내 자신의 감성적인 기쁨에 묶여 피곤케 된 육신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놀라운 축복을 상상하며, “네” 하고 주님 앞에 대답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열매를 맺는 삶이란 남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삶이다. 또 나 자신을 하나님의 장중에 완전히 떠맡기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치 않는 ‘완전 항복’이 십자가의 길이다.

 

5.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진리는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죽음과 부활, 이 양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영적 삶은 영향을 받게 된다. 부정적인 면에서의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긍정적인 면에서의 영적인 생명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부정적인 죽음의 진리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실제적으로 영적인 죽음 가운데 빠져 삶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 반대로 긍정적인 부활의 생명만을 주장하다 보면 옛 아담의 본성적인 생명을 처리할 수 있는 죽음의 역사가 상실되어, 우리 안에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기 원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게 된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처리될 때에만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체험적인 결과는 영의 자유함을 가져온다. 원래 영은 혼과 육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의 영은 본성적인 자연인의 생명과 육에 묶여 주님과의 영적인 결합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가 ‘살리시는 영’인가? 어떻게 육신에 속한 것들을 잘라내는가?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 어떻게 십자가를 적용하시고, 또 어떻게 우리의 옛 사람의 생명을 죽음으로 넘겨 우리의 영을 해방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영과 결합시키는가?

 

그 해답은 히브리서 4:12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와 같이 우리의 영이 부활하신 주님과 한 영을 이루게 되면, 우리는 영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세례를 받고 육을 벗을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된다. 그리고 성령은 아주 세밀하게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셔서 성령을 좇아 생활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알아가게 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9-1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겨우 찻잔 하나를 채울 정도의 미미한 충만함이 아닌가? 바울은 그런 식의 충만함이 아니라 “그 안에 모든(완전한) 충만함이 거한다!”고 말씀한다. 곧 바다 같은 영적인 충만함 안에 이미 거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0-12)

 

우리는 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 것인가? 해답은 바로 부활의 생명 측면에 있는 십자가에 있다! 이제 성도들은 주님과 연합함으로 한 영을 이루어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죄와 육에 대한 승리를 체험하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생명 측면에서 연합되어 오늘날 교회를 공격하고 주의 나타나심을 지연시키는 어두움의 세력들을 무찌르도록 보내심을 입었음을 기억하자. 두세 사람이 기도로 모인 곳에는 사탄의 궤계를 멸절시킬 수 있는 계책이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6. 십자가와 영적 생활

이제 인간의 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의 도를 우리 안에 깊게 적용해서 혼과 영을 쪼개어 갈라내고, 민감한 영의 감각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깊은 신령한 것들을 이해하고 감지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영의 감각을 ‘직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중생하지 못한 자에게는 직관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깨달을 수는 없으므로 이런 영의 기능은 사실상 직관 이상의 것이다.

 

영적인 사람의 직관은 성령이 내주하고 계신 그 인간의 영을 통해 나타난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 깊숙이 침투하셔서 조명하시고 정결케 하시는데, 그때 인간의 마음은 흙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연인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새롭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2: 2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권면한다. 그 결과 우리 안에 있는 ‘지성’마저도 영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을 우리의 마음으로 깨닫고, 영으로 알고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1) 성령의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는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 5-6)

 

2)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 14)

 

3) 영적 생명이 바깥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 38-39)

 

4) 영적 전쟁에서의 영의 능력에 대해 살펴보자: 성도들이 영을 사용할 때는 영적 전쟁 중에도 조용해진다. 승리는 오직 조용하고 단순한 말씀 가운데서 오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영을 강건케 하시고 원수들의 세력을 대적하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우리에게는 이같이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하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영적 생활이 필요하다!

 

7. 십자가와 성령 충만

갈보리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갈보리에서 일어났던 모든 외적인 사건들이 내 안에 그대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 것과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진리의 사실을 믿음으로 그 모든 사실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예수님이 지신 것과 같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겪으신 것과 같은 비참한 형벌을 나 자신이 친히 받고 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부활의 의미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내가 부활의 참된 의미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주님이 무덤을 뚫고 나오셨듯이 내가 그 순간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부활을 실제로 경험했다는 뜻은 아니다(물론 우리는 언젠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런 부활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오순절 사건의 모든 외적인 현상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미 성령의 시대가 아닌가! 성령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받은 백성을 부르시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성전인 교회를 세우시는 성령의 역사권 안에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갈보리’ ‘부활’ 그리고 ‘오순절’의 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마귀가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교회 안에 들어와 거짓 이적과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도들이 먼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오순절의 능력과 은사들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성도들은 십자가를 단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준비된 죄 사함의 자리로만 여길 뿐, 그들 안에 역사하는 옛 아담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 성령의 깊은 십자가의 사역을 무시한 채 오순절을 부르짖고 능력을 부여받겠다고 간구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생명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그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린 성도들의 삶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 안전한 위치인 것이다.

 

오늘날 곳곳에서 일어나는 악령들의 역사와 거짓 영들의 세력을 고려할 때, 십자가의 기초가 전혀 없는 무리들에게 능력이 부은 바 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날는지 능히 상상할 만하다. 이것이 오늘날 아버지께서 교회 안에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제한하고 계신 이유가 아닐까?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박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때, 우리는 마치 하늘에 있는 혹성들이 태양의 궤도를 따라 돌 듯이 종일토록 하나님의 궤도 안에서 운행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매순간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전폭적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곧 우리는 하나님이 붙드시고 주장하시며,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에베소서 2: 13-17)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오직 십자가뿐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되었던 것’들을 멸하셨기 때문이다. 중생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여 새로운 피조물을 이루고,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며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이 하나님의 ‘새 사람’으로 지은 바 되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인 그 몸의 지체가 된 것이다.

 

8. 십자가와 혀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 2).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약 3:11).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우리가 얼마만큼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깊숙이 연합되어 있으며, 또 중생함으로 우리 안에 새롭게 창조된 영적 생명이 얼마나 성숙한지는 우리 자신의 ‘혀’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된 십자가를 체험한 영혼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의 죽으심을 항상 우리 몸에 짊어지고, 또 ‘혀’의 요란함과 분쟁을 피해 만세 반석 아래 숨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배워야만 한다. 영적인 사람은 새 생명의 완전한 지배와 제재 아래 온전한 성숙을 이루어 ‘육’마저도 절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뱀에게서 물려받은 죽음의 독소가 우리 안의 ‘생의 바퀴’를 계속 충동질하지 못하게 하려면,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 깊숙이 거하며 혀를 절제하고 오직 치유와 축복과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복음만을 전하는 하나님의 채널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이 시간에 하나님의 빛이 우리 입의 말들을 조명하시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우리의 하는 말 가운데 무엇이 귀중하며, 무엇이 천한 것인지 분별하도록 하자. 우리는 위기를 맞이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주님의 ‘입’이 되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다.”(렘 15: 19)

 

9. 십자가와 영적 부흥

십자가를 영적 생활의 유일한 중심축으로 삼고, 십자가가 성령이 사역하시는 모든 측면의 기초와 중심이 됨을 깨달을 때 부흥은 일어난다. 그러므로 ‘영적 부흥’은 성령이 중생한 영 안에 충만히 임하시고 또 그 영이 밖으로 흘러나온 결과이다. 성령 세례와 그를 통하여 주시는 능력은 우리 안에 아주 민감한 영적인 감수성을 부여한다. 만일 우리가 그 영적인 감각을 잘 감찰할 수 있다면, 성령과 동역하는 법을 쉽게 터득할 수 있고, 내 영 안에 성령이 어떻게 움직이시는가는 물론 다른 사람들 안에서 운행하시는 성령의 흐름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영적 부흥을 방해하는 몇 가지 요소로는 첫째, 영적인 면에서 겸손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놓지 못하는 영을 소유할 때, 둘째, 생활적인 면에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치 못하므로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요소들을 삶 가운데 방치해 둘 때, 셋째, 사역적인 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하려 하지 않고 증거하지 않을 때이다.

 

이런 방해 요소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첫째, 영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교만한 마음을 굴복시키고, 내게 범죄한 자들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순종해야 하며,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조명 받아 생활 가운데 옳고 그른 일들을 분별하고, 빛이 비취는 대로 즉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들을 처리해야 하며, 셋째,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항복함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과 증거를 담대히 전해야 한다.

 

또한 영적 부흥에 따르는 위험 요소들이 있는데, 첫째, 주님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삶이 아니라 육신의 감정이나 감각에 의해 행동하고 생활할 때 따르는 위험이 있고, 둘째, 성령의 사역을 모방하는 악한 영들로부터 일어나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영적 부흥을 놓고 기도할 때 우리는 이런 영적 위험성이 따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지혜롭게 기도해야 한다. 특별히 말씀과 영적으로 무장되어 영적인 분별력을 얻도록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영적인 원칙과 마귀가 역사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주님이 주신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으로 충만하다면, 혹 부흥의 영적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순수한 영으로부터 거짓 영들의 모방으로 바뀌어지는 현상이 일어날지라도 즉시 포착하여 영적으로 대처해서 다시 순수한 성령의 흐름과 역사가 일어나도록 바꿀 수 있는 것이다.

 

10. 십자가와 선포

고린도전서 2: 1-2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간증한다.

 

또한 디모데후서 4: 1-5에 바울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마지막으로 전파자로서의 바울의 영적인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그는 오직 분명하고 이미 계시된 십자가의 도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정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했고, 그의 진실한 메시지와 청결한 삶을 통해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했던 것이다. 간절히 바라기는 그와 똑같은 영이 우리 안에도 있어 우리도 새로운 능력과 시각으로 십자가의 도를 전할 수 있도록 도전받고 권면받기를 원한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 1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