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7일 목요일 고난주간 넷째 날 설교 제목: 치유가 되었다면 본문: 신명기 32:1-12 지난 주일, 아들 내외가 아내 생일이라서 효도 차원으로 깜짝 방문했습니다. 아들 목사가 주일 사역을 마치고 자기 처와 잠시 제천에 내려와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고 돌아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 내외라서 반가웠습니다. 1박 2일의 잠시의 방문이었는데 돌아가니까 더 반가웠습니다. 아침 식사를 나누다가 아들이 제게 CHAT GPT 이야기를 불쑥 꺼냈습니다. “아버지, CHAT GPT를 잘 활용하면 상당히 도움이 돼요. 제가 제 설교문을 입력해서 GPT에게 물어보았어요. 부족한 문구가 뭐가 있는지, 성서 해석에 있어서 더 보강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했더니 내가 보지 못햇고, 알지 못했던 내용을 기가 막히게 요약해서 알려주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아버지도 한번 시도해 보면 적지 않은 도움을 받게 될 거예요.” 아들은 상당히 진지하게 제게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반응했습니다. “너나 잘 하세요.” 제가 아들에게 이렇게 힐문했습니다. “CHAT GPT의 우수성, 활용에 대한 적절성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는 AI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 영혼에 대한 접근과 그들과의 대한 소통은 내가 하나님께 조명받은 은혜의 접목이지, 도구를 통한 대리 전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AI가 아니라, 하나님과 일대일로 묵상하며 받은 은혜가 느려도, 진부해도 붙들고 사역하련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시인은 시편 121:1〜8절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적어도 이런 도움의 원천이신 주군께 받은 은혜를 나는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은혜는 현장성의 간증적 모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지난 40년 공동체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노래한 찬양 고백입니다. 하지만, 뼈아픈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모세가 반추한 하나님의 은혜와 뼈아픈 교훈을 나누어 보십시다. 1) 이스라엘의 실패담을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본문 5절 한 절이 매우 아프게 뼈를 때립니다. 신명기 32:5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신명기를 영어 성경의 표제로 말할 때 두 번째로 말한 계명이라는 의미로 “DEUTERONOMY”라고 합니다. “DEUTER”는 ‘두 번째’라는 의미이고 “NOMY”는 ‘법’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이 보이는 느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40년간 일어났던 광야에서의 사건을 반추하고 하나님이 주셨던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이스라엘 공동체 백성들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의 설교인 셈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메시지를 두 번째로 복기하면서 모세다 토로한 메시지의 중심 내용 중에 제일 먼저 확인한 내용이 5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기가 참 부끄러울 정도도 하나님께 범죄 한 백성임을 다시 고발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흠이 있는 자들, 그리고 삐뚤어진 세대라고 지적했습니다. 부인하지 못할 팩트입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패역함의 극을 달렸던 세대였습니다. 지난 40년의 광야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은혜를 망각한 공동체가 패역의 끝을 보여준 기간이었습니다. 정말로 지긋지긋한 불신앙의 끝판을 보여준 시기가 40년 광야 시기였습니다. 숙곳에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광야 행군은 홍해에서 불신앙의 면모를 보여주더니 40년 내내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마라에서도 그랬고, 시내산 난장은 어이가 없는 패역함이었고 이후 신 광야에 도착한 이후 르비딤에 이르러서도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고, 기브롯핫다하와에서 고기를 먹지 못하다고 불평하며 그들의 욕망이 그 끝에 달했고,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메뚜기 콤플렉스로 하나님을 대항했고, 하세롯에서는 모세마저도 자기 회를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림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흠짓을 내는 패역함의 연속이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불신앙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오죽하면 하나님이 너희는 삐뚤어진 세대라고 책망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포기하는 게 맞습니다. 물론 이런 패역함의 심판으로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죽는 심판으로 이어졌지만, 놀라운 건 그런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패역함의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당신의 일을 행하셨습니까? 2) 치유하시며 만들어가셨습니다. 2절을 읽어 봅니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모세의 이 찬양 고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상태를 아시고 그 공동체를 만들어가셨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슬처럼 비처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갈(渴)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11:14절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팔레스타인의 토양은 가장 무더운 4〜7월이 건기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10〜11월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본격 파종하며 농사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명명합니다. 더불어 이듬해 3〜4월에 건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시 비가 내리는 데 이 비를 늦은 비라고 말합니다. 이때 내리는 늦은 비는 곡식의 결실을 가져다주는 결정적 비이기에 너무나도 소중한 비입니다. 성경은 곧잘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임한 은혜를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단어를 동원하여 마르지 않는 은혜의 소낙비를 하나님이 공급하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세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처럼 교훈을 주셨다고 2절에서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며 치료하셨습니까? 본문 6절에 눈을 고정하십시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어디 이뿐입니까? 9〜12절의 모세의 고백은 은혜입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종합해 보십시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치유하시며 만들어가셨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기에 이스라엘을 택한 기업으로 삼으셨고, 눈동자같이 지키셨으며, 끝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도전과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 내게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것이 내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신 것이 내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홀로 인도하신 것이 나에게 무엇이었습니까?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를 치유하신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날마다 치유하시며 나를 만드셨고, 만드시며, 만들어가실 겁니다. 제게 목회의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을 말하라고 하면 두 번의 위기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파주 동산 교회 목회 때였습니다. 섬기던 동산 교회 장년 신자들의 면면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거의 정신병자 수준에 있는 삶의 실패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어깃장이 도를 넘어 교회의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저는 목회를 접든지, 아니면 교회를 옮기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하남에 있는 기도원에 올랐습니다. 대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막 따지며 기도했습니다. 이러려고 나를 목사 만들었느냐고 따졌습니다. 내려와야 하는 금요일 아침에 성전에서 다시 엎드려 따졌습니다. “하나님.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나하고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데굴데굴 구르며 이 기도를 드리는 데 벼락같은 슬라이드가 제 눈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열 명 정도의 섬기던 교회 청년, 학생들의 얼굴이 제 눈앞에서 슬라이드처럼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슬라이드가 지나갈 즈음, 제게 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들아, 이 아이들 가지고 는 안 되겠니? 내가 너를 위해 남겨둔 이 아이들 말이다.” 그날, 저는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눈물로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기며 7년 사역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위기는 제천에서의 위기였습니다. 설교에서 생략하겠습니다. 이제는 목회의 마지막 필드에 있는 저는 이렇게 간증할 수 있습니다. 지난 37년의 목회 여정을 지날 수 있었던 건, 날마다 나를 치유하시며 만들어가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치유의 은혜가 어찌 저만의 간증이겠습니까? 신앙 여정은 투쟁입니다. 날마다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깨지고 터지고 자빠지는 일의 연속을 경험하는 전쟁터입니다. 그러기에 주지하다시피 우리 홀로 이 전쟁터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놀랍고 신비스러운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며 치유의 은총을 날마다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치유라는 명제가 내게 해당하는 이유는 이 치유의 단비를 내가 받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갈한 나의 영혼을 생수로 가득 채우소서/이 곤한 내 영혼 위에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이 찬양은 살아 있는 찬양의 고백입니다. 현재 진행형의 은혜입니다. 치유 받은 교우 여러분! 9〜12절의 은혜가 오늘도 여전히 진행 중임을 믿고 은혜에 감사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자 너의 환란을 면케하시니/그가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기도 제목) 1) 하나님, 내 삶의 현장이 날마다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2) 하나님, 나뿐만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영역의 지체들에게도 치유의 은혜가 날마다 임하게 하옵소서. 3) 하나님, 이 치유의 은혜를 잊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