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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4월 14일 고난주간 첫째 날 말씀: 치유가 있기까지2025-04-19 08:12
작성자 Level 10

2025414일 첫째 날 말씀

 

제목: 치유가 있기까지

본문: 누가복음 5:17-26

 

찬양을 드리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 나의 좋은 치료자/그의 눈이 머무는 곳은 나의 슬픔과 고통

고갤 들어 그의 눈을 볼 때에 난 알았네/예수 나의 좋은 치료자

예수 나의 좋은 치료자/그의 손길이 닿는 곳은 나의 상처와 아픔

영원히 흐를 것 같았던 눈물 다 멎었네/예수 나의 치료자

나 노래하리라/천한 나를 돌아보신 구세주를 찬양해

하늘 닿는 곳까지 내 손 들리라/예수 나의 치료자

 

작금의 시대를 정의한다면 모두가 병들어 있는 질병의 시대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동서남북,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집단 병동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모두가 병들어 있는 듯 보이는 세태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본문이 주는 교훈이 참 심대합니다.

오늘 본문은 중풍 병자를 고친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들여다보면 두 종류의 병자가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육신이 병든 자인 중풍 병자가 있었습니다.

한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18)

이런 육체적 질병을 앓고 있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이에 반해서 더 심각한 질병인 영혼이 병들어 있는 자도 보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새롭고 신선한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함으로써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한 유대 종교라는 기득권 체제를 흔드는 자는 그가 하나님이라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각오로 유대 종교를 사수하려는 영혼이 병든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도 병들고, 육도 병들어 있는 이들이 지천에 있었던 갈릴리 지역의 한복판에 중증 질병을 치유하는 주체이셨던 예수님이 계셨다고 보고하는 의사 누가의 보고는 의미심장합니다.

본문 20절과 2425절을 봅니다.

먼저 2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번에는 2425절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토대로 우리 세인 지체들이 지녀야 할 치유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인간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읽습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의 권위는 당시 무명에 가까운 예수가 넘볼 수 있는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비교 불가입니다.

하지만 누가의 표현이 기가 막힙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누가는 의사이기에 특히 육체적 질병에 대한 치유라는 화두에 대단히 민감했을 것입니다.

그런 전문의인 누가가 인정한 것이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라는 종교 전문가에게 있지 않고 무명인 예수와 함께했다는 보고입니다.

왜 이런 보고를 남겼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치유자임을 의사 누가가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날, 편두통으로 인해 심한 통증을 달고 살았습니다.

여러 치료를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경과 전문의 집사님을 우연히 소개받아 그분의 치료 소견에 동의하고 그 방법에 따라보기로 했습니다.

그 집사님이 제가 주었던 처방전은 타이레놀 한 알과 원두커피 한 잔으로 버티라는 처방이었습니다.

기실, 엄청난 두통으로 인해 저는 두통을 완화시킨다고 하는 여러 한방, 양방 치료를 받았기에 약물에 거의 중독되어 있던 차였는데, 신경과 의사의 말은 중독된 약물을 중단하는 게 먼저이기에 힘들어도 두통의 징후가 오면 커피 한 잔, 타이레놀 한 알 외 그 어떤 약을 복용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 지침을 하달했고, 거의 한 달 동안 약물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금단 현상과 싸웠던 힘겨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경과 의사가 제게 했던 인상 깊은 말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두통의 원인이 알려진 것만 일만 가지입니다. 그 원인을 추적하여 치료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최소한의 진통제를 복용하고, 하나님 앞에서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두통에 가장 좋은 치료 방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의사의 말은 목사로 사는 제겐 죽비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대와 제게 권하신 명령은 가지고 있는 짐을 내게로 와서 내게 맡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을 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무거운 을 의미하는 헬라어 페홀티스메노이’ (πεφορτισμένοι) 는 문자적으로 도무지 내 힘으로는 들 수 없는 무게의 짐을 의미합니다.

적용한다면 아무리 기를 쓰고, 옴짝달싹한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인생의 무게를 나에게 맡기라는 권고일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짊어질 수 있는 무게의 짐을 내게 맡기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저히 네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나에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누구도 이렇게 말했던 이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아무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이렇게 말하고 명하실 수 있습니다.

왜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을 찾아 나왔기 때문입니다.

 

12년을 부인과 질환으로 고통을 당하던 여인이 주님께 찾아 나오기로 마음먹고 세간의 핍박을 각오한 끝에 주님이 계신 장소로 자기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예수님을 본 여인이 행동한 내용을 마가복음 기자는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마가복음 5:25-28절을 증언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의 옷에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함일러라

12년이라는 세월은 이 여인에게 페홀티스메노이였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무게의 짐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극한의 한계점에 도달한 여인은 이 한계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치유하실 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고 목숨 걸고 주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유대 율법은 여인이 유출하는 경우를 부정함으로 여겨 그들의 행동반경을 엄격히 규정하는 율례가 있습니다.

레위기 15:31-33절입니다.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라 이 규례는 유출병이 있는 자와 설정함으로 부정하게 된 자와 불결기의 앓는 여인과 유출병이 있는 남녀와 그리고 불결한 여인과 동침한 자에 대한 것이니라

회중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이런 핸디캡이 여인에게 있었는데 여인은 죽기를 각오하고 주께 나온 것입니다.

주께로 나온 것이 곧 믿음입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1820절에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한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의 친구를 주님 앞에 들여놓는 행위, 그거 하나면 됩니다.

여의치 않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 친구를 기어이 주님께 내려놓으려는 믿음, 주님은 바로 이거 하나면 된다고 인정하십니다.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믿음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생각에 붙들려 있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이 주님에게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영적 장애물임이 틀림없습니다.

믿음의 단순함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싸늘합니다.

정상적이지 않다. 광신적이다. 지혜롭지 못한 처사다. 요즘도 그런 구시대적 믿음으로 살아가는 박물관 소장 믿음이 있느냐 등등 비아냥거립니다.

하지만, 중풍 병자 친구가 고침을 받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주님께로 그를 데리고 왔다는 점입니다.

치유는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연대했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다시 봅니다.

한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메고 주님께로 나아갔다고 진술합니다.

중풍 병자는 혼자서 거동할 수 없습니다.

그가 중풍 병에서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만병의 치료자이신 예수께 나온 것이 그 결정적인 이유였음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께 그 환자가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의 도움 즉 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인간 고통의 치유는 함께하는 이들의 연대가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나아만은 계집종과 하인들의 연대가 있었기에 나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이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과 그가 보낸 유대인의 장로들이 보여준 연대 때문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안드레의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이 유일무이한 치유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 주님에게 내 문제를 맡기기 위해 그를 찾아 나와야 합니다.

그분에게 같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연대적 동지가 필요합니다.

거기에 주님이 치료하시는 은혜가 임합니다.

나는 이번 집회에 이런 믿음이 생성되는 귀한 고난주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제목)

1) 주님만이 나의 치료자 되신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2) 아픔의 극복을 위해 주님께 찾아 나오는 적극적 믿음을 주옵소서.

3) 믿음의 연대를 돕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