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8일 금요일 고난주간 다섯째 날 설교 제목: 약하지만 본문: 고린도후서 12:7-10 아주 가끔, 제게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치열하게 사역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결정적인 종교적 근간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러다가 문득 스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낳은 걸출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갈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철학적 숙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절망은 일종의 죄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문제는 인간은 그 절망을 극복할 수 없는 제한적 존재라는 점 때문에 인간에게 종교가 상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는 전 세계적인 생물학자입니다. 그가 주일에 천안에 있는 나사렛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는 데이빗 윌슨이라는 무신론 생물학자에게 배운 무신론자라고 정의해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틀리지 않은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그가 왜 교회를 나가는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유트브 방송에서 전해주었던 일갈이 제 머릿속에 박혔습니다. “나는 주일에 교회를 나갑니다. 아내를 위한 배려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나갈 때, 나 같은 과학자가 과학적 두뇌를 총동원해도 해석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가 있다는 점에서 아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또한 신앙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진실하게 하는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믿는 믿음으로 인해 전인적 건강성을 유지한다는 신비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사람 즉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갖게 되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 질병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보았지만 큰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절망이 있습니다. 그 절망의 끝에서 인간을 끝까지 붙들어주는 아딧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카일 아이들먼 목사가 전했던 명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써 궁극의 역기를 들어 올리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힘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닌 그분의 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너무 약할 때, 우리 자신의 끝이 이르렀을 때, 그분을 의지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카일 아이들먼, 『나의 끝, 예 수의 시작』, 두란노, 210쪽) “Jesus begin at the end of me.” 이 문장이 명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약 성경 27권 중 13권을 기록할 정도로 하나님의 계시를 많이 받은 사도였으며 지혜와 학문이 뛰어난 분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은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잘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다른 사도 보다 신령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내적으로 큰 고민을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은 육체의 가시, 사단의 가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성경이 보고하지 않아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분명한 사실은 당시의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같으면 암이나 고질적인 성인병인 것 같습니다. 질문 하나, 하나님의 계시와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런 몹쓸 병에 시달림을 당하고, 다른 사람을 고치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없었을까 질문하게 합니다. 답을 내기 전에 저와 여러분이 먼저 접근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병을 고치지 못했지만, 그로 인하여 바울 스스로가 더 위대한 신앙의 삶을 살았던 영적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1) 자만하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자기 질병을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7절을 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두 번에 걸쳐 사용한 단어 ‘자만하다.’로 번역한 헬라어 ‘휘페마이로마이’는 스스로 ‘거들먹거리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이의 치명적 암세포는 거들먹대는 교만함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지론에 의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일체 육체적 연약함은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연약하기에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극복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는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나훔 2:1〜2절에 이런 예언의 소리가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나훔 예언서는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메시지입니다. 앗수르는 자기의 군사력, 물리력을 의지하며 승승장구했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안하무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안하무인의 교만함을 좌시하지 않으십니다.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파괴하는 나라로 세워 앗수르를 무너뜨립니다. 이어지는 나훔 3;1-5절에 앗수르를 수치의 나라가 되게 할 것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교만한 열방은 하나님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16:18절에서 선포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바울은 이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육체의 가시가 내게서 떠나지 않음에 감사했습니다. 이런 은혜는 우격다짐의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자기의 질병을 위해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본문 8〜9절을 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주님의 뜻을 알았던 바울은 자기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해석하며 도리어 약함에 대한 신학적 함의를 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함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2) 약할 때 곧 강하게 됨을 알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후서 12:5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더불어 이어지는 본문 9〜10절을 깊이 묵상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 믿음이 곧 치유입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치유 받은 이의 보물 같은 신앙의 엑기스입니다. 시인은 숱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시편 103:15〜16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이게 인생 아닙니까? 이런 인생의 걸개그림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약할 때 곧 내가 강함이나라는 고백은 바로 이런 신앙의 그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약하니까 기도합니다. 아프니까 엎드리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니까 하나님께 두 손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최고로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이자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치유입니다. 이것을 경험한 자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시편 62:5〜6절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저는 엘리사를 읽을 때마다 솟구치는 감동을 받습니다. 열왕기하 13:14절을 소개합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엘리사의 병명은 죽을 병입니다. 이 당시는 요아스가 치세하던 시기였습니다. 요아스가 치세하던 북쪽의 형편은 매번 모압과 암몬의 공격에 시달리던 때였기에 요아스는 그의 영적 멘토인 엘리사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사실에 몹시 슬퍼하며 애통해 했습니다. 병문안을 온 요아스에게 엘리사는 암몬에게 세 번 승리할 것에 대한 예언을 남깁니다. 결국, 요아스는 엘리사의 예언대로 벤하닷의 암몬 군대의 침입을 받았지만, 세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주목할 것은 열왕기하 13:18〜21절입니다. “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 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요아스에게는 승리가 임했지만, 엘리사가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가자, 약 1년 뒤에 이번에는 모압의 도적 떼들이 급습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바로 그때, 마침 사망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장사지내던 이들이 모압이 시신을 훼손할까봐 엘리시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묘실에 시체를 던지자, 엘리사의 뼈에 닿은 시신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임했다고 보고합니다.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마지막으로 질문해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은 죽은 자의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으면 다시 살아나게 할 정도로 엘리사의 권능을 그가 죽은 이후에도 보이셨는데, 막상 그 당사자인 엘리사의 병을 고쳐 주지 않으셨을까? 엘리사도 때가 되어 죽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때가 되면 죽습니다.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이 죽음입니다. 하지만, 엘리사가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그 누구도 평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이 연약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연약함 때문에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더 집중하게 됨을 엘리사 보고를 통해 알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주님은 연약할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으로 인해 나는 영적으로 강해지고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받게 되었음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연약한 내가 바로 곧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임에 감사하십시다. 이제 찬양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약할 때 강함 되시네/나의 보배가 되신 주/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나는 포기할 수 없네/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십자가 죄 사하셨네/주님의 이름 찬양해/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나의 빈 잔을 채우네/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기도 제목 1) 하나님, 내 상태의 연약함으로 좌절하지 말게 하시고 도리어 영적으로 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주옵소서. 2) 약할 때, 내가 정말 강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3)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