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신년감사주일 예배 설교
제목: 성서가 증언한 밑힘으로 든든히 서 가는 교회
본문: 사도행전 6:1-6
서론)
안식년 때, 소 아시아 성지 순례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터키 에베소 유적지에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아주 유명한 오데온 유적지를 관람했을 때의 소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데온이라는 유적지는 지금으로 말하면 음악당 혹은 연극장입니다.
이 유적지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이곳이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제 3차 전도여행 중 사역의 절정을 보였던 에베소 사역을 누가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소개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에베소 지역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성령 세례를 경험하게 되는 역사를 맛봅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3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면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그 유명한 두란노 서원의 효시를 만들었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는 역사까지 이루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초자연적인 기적과 이적을 보였는데 하나님은 바울이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 위에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들로 축사하는 능력들을 나타내시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능력을 부러워하던 유대의 한 제사장 가문이었던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은 바울을 따라 하다가 도리어 악귀들에게 공격을 받아 피해를 당하는 해프닝까지 일어나는 것을 보자 에베소에 살고 있었던 수많은 우상 숭배자들과 마술사들이 자기들이 믿던 각종 책들을 가져와 사람들 앞에서 불에 태우고 하나님의 말씀은 힘을 얻어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영적 혁명이 일어났던 장소가 바로 에베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베소에서 아르테미(아데미) 여신을 섬기던 은세공업자인 데메드리오가 에베소 사람들을 선동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의 가장 큰 우상인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신당 제작자였습니다.
이런 일로 먹고 살던 그가 생계의 위협을 느낀 것은 바울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손으로 만든 우상은 거짓이고 헛된 것이라고 에베소에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이심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전술했듯이 이런 바울의 사역으로 인해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가 현격히 많아진 것을 눈으로 목도한 데메드리오는 이렇게 가다가는 폐업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에베소에 살고 있었던 아데미 숭배자들을 선동하며 부화뇌동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선동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사도행전 19:25-27절입니다.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이런 선동으로 인해 에베소에 있었던 바울의 제자들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분노한 에베소 우상숭배자들에게 체포되어 오데온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이어지는 사도행전 19:28-30절이 보고합니다.
이것을 듣게 된 바울이 제자들이 만류를 하지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오데온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바울이 이 오데온으로 들어갔다고 해석한 것은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걸어왔던 그간의 행보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았던 에베소에 있는 오데온 때문입니다.
오데온은 분명히 원형으로 되어 있는 극장입니다.
그런데 성지순례 때 제가 에베소 극장으로 들어가던 통로에는 아주 길게 늘어선 야생동물들의 대기 장소가 있었습니다.
의아해 하던 저에게 가이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곳은 바로 굶주린 사자들이 대기하던 곳입니다.”
순간 어지러웠습니다.
헨리 센케비치가 쓴 ‘쿼바디스’에 소개된 로마 콜로세움에 있었던 사자 대기소가 여기에도 있다는 말에 정신을 곧추 세웠습니다.
수많은 우상숭배자들이 몰려든 오데온의 운동장 한 복판에 서 있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게 위해 신변의 위협을 마다하지 않고 함께 그들과 섰던 바울, 도대체 이들은 문만 열면 뛰어 나올 굶주린 사자들 앞에서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죽음도 불사하려고 했을까?
물론 에베소의 이 긴장된 보고는 하나님께서 바울이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 서야 했기에 알렉산더라는 유대인들을 들어 극적으로 이 세 사람들을 구원한 일로 해피엔딩 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지난 시간의 차이만 있었지 바울을 물어뜯기 위해 문만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자굴 속이라는 동일한 공간에 서 있었던 저는 또 다른 선명한 영적인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찾은 그날의 조명의 음성을 말입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날 그곳에서 들었던 바울의 고백을 말입니다.
사도행전 20:23-24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밀레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선언한 바울의 신앙고백이지만 저는 그날 바울의 이 고백이 에베소의 오데온 지하 사자굴에서 공명되어 들렸습니다.
바울이 바울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이방 형제들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이후 로마에서 순교를 당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는 바로 그 사실 말입니다.
바울이 붙들었던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저는 교우들에게 줄곧 표현한 단어로 다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본질’ 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2018년 이 ‘본질’이라는 단어를 다른 대치어로 사용할 것입니다.
‘밑힘’ 곧 ‘저력(底力)’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바울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떠받히고 있었던 밑힘이 든든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밑힘 즉 저력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본론)
초대교회가 부흥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자 예루살렘 초대 원형 교회가 했던 사역이 무엇이었는지를 오늘 본문이 분명히 알려줍니다.
바로 구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집중했던 내적 사역은 교회 내의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과부들에게 그들의 일용할 양식들을 교회에서 직접 공급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역은 참 괜찮은 사역이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범주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사역이 공평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눈 여겨 보십시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여기에 기록된 단어 ‘제자’는 헬라어 ‘마세테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남용되는 제자라는 개념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1절에 기록된 ‘제자’는 사도 그룹에 이어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두 번째 그룹에 해당하는 선두 그룹에 있는 자에게 붙이는 단어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카일 아이들먼 목사가 쓴 ‘NOT A FAN’ (팬인가? 제자인가?)를 거의 읽었기에 제자의 의미가 어느 정도의 헌신을 해야 하는지에 익숙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구제 논쟁이 일어난 현장은 제 2그룹의 제자들이 많아진 예루살렘 교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의 심중함이 있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설명해 보십시다.
그냥 선데이 크리스천들이 기독교 신앙을 교양 삼아 나오는 명목적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가 주님이심을 믿는 확실한 신앙 공동체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을 염두 하여 본문을 접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현장에서 구제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주류였던 히브리파 과부들은 교회에서 배려하는 구제에 적지 않은 혜택과 배려를 받은 반면, 헬라파 과부들은 어느 경우 매일 한 번씩 공급받아야 하는 구제에서 탈락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행태에 대하여 원망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어 이해에 접근해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는 두 종류의 유대인들이 존재했습니다.
한 부류는 오늘 과부의 구제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던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나라를 잃고 팔레스타인을 떠나 인근 소아시아를 비롯한 헬라 지역에서 삶의 근거지를 삼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소위 말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본토로 돌아왔지만 당시 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이런 이유로 당연히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는 비주류에 속한 집단이었습니다.
또 한 부류는 고국을 떠나지 않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난의 굴곡을 통과한 그룹이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쓰는 자들이었고, 난국 중에서도 조국을 떠나지 않은 자들이었기에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터줏대감들이었고 주류였습니다.
더 주목할 것은 사도로 주님에게 임명받은 자의 대다수가 이 계통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예루살렘의 실질적인 권력들이었고, 요즈음의 단어로 말하면 실세들이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질적인 권력이었던 사도들이 오늘 본문에서 문제의 사단이 되었던 구제까지 도맡아 관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 2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이 구절은 아주 선명한 사도들의 오류들을 고발합니다.
12명의 사도들이 ‘구제’라는 사역을 포함한 일체의 ‘접대’까지 관할했다는 점입니다.
조금 양보하여 만에 하나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이 이방인 전도 사역을 하면서 세웠던 이방 가정교회와 같이 소규모의 교회공동체라면 나름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겠지만 본문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베드로가 한 번 사자후를 토하면 하루에도 3,000명이 회심하는 강력한 성령 공동체였기에 추측하기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공동체주의 교회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 살림의 규모는 오늘로 말하면 메가 처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런 대규모 공동체의 살림을 맡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업주의의 형태요, 기업주의의 형태이지 않겠습니까?
직전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쓸데없는 모임에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압박입니다.
생리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고, 자리에 모든 신경이 가 있는 목사라면 또 모르겠지만 저같이 태생적으로 정치적이지 않는 자들은 그런 모임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습니다.
외적 요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적인 요소를 돌볼 수 있습니까?
불교적인 속칭으로 말하자면 잿밥에 관심이 있는 중이 어떻게 염불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 교회의 사도들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말씀을 제쳐 둔 접대하기’였습니다.
‘기도하기를 소홀히 한 구제’였습니다.
사도들은 교회가 구제로 인하여 심각한 내홍에 빠지자 이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돌이키기로 합니다.
본문 3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잘 아시는 것처럼 사도들은 본인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 일 즉 구제 및 접대의 일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7명의 집사를 세워 그들에게 맡기기로 합니다.
여기에 기록한 ‘맡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스테쏘멘’은 원래의 의미가 ‘넘기다’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소유권을 완전히 양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성경 NIV에서 이 대목을 적절하게 이렇게 번역한 것을 보았습니다.
“We will turn this responsibility over to them.”(우리는 그들에게 이 모든 책임(권한)을 되돌릴 것입니다.)
저는 이 해석에 대하여 긍정의 박수를 보냅니다.
사도들이 많은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는 세속적 가치일 수 있는 구제(접대)에 대하여 다시는 기웃거리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이는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미련을 두고 기회가 되면 세상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기득권적인 권력의 맛에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본인들의 이런 단호한 선언을 말로 그치지 않았음을 본문이 제시합니다.
본문 5-6절을 읽겠습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우리가 잘 아는 초대교회 일곱 집사의 명단이 소개됩니다.
‘면류관’이라는 뜻의 스데반,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빌립, ‘춤의 지도자’라는 의미의 브로고로, ‘정복자’의 뜻을 갖고 있는 니가노르, ‘존경해야 함’이라는 의미의 디몬, ‘완고하다.’는 의미의 바메나, ‘백성의 정복자’라는 뜻의 니골라 집사가 뽑혔습니다.
이들 일곱 사람에게서 무엇이 보입니까?
모두의 이름이 헬라식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일곱 명의 정체성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에 일어난 혁명이 보이십니까?
사도들이 정신을 차리자 일어난 혁명 말입니다.
다시는 사도들은 구제나 접대와 같은 공궤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의가 말이 아닌 삶의 결단이라는 혁명으로 승화되었음을 말입니다.
저는 사도들의 이 결의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결의가 있었기에 사도들은 그 다음의 행보를 걸을 수 있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의 행보가 무엇이었습니까?
본인들의 입장을 표명한 사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되돌아가기로 한 그 다음의 행보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제 찾아보고 설교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본문 4절을 읽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결의한 그 다음의 행보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밑힘입니다.
이것 무엇입니까?
저력(底力) 즉 밑힘입니다.
왜 이것이 밑힘입니까?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변화산상에서 내려오시자마자 제자들과 변론하고 있는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비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했는가에 대하여 주님께 질문하며 갑론을박할 때 주님이 선언하신 레마에 집중해 보십시다.
마가복음 9:29절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제는 마태기자의 전언으로 눈길을 돌립시다.
마태복음 28:19-20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사역은 주님이 사도들에게 위임한 사역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지탱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역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지지하시고 지탱하시는 사역이 무엇입니까?
밑힘 즉 저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세인교회가 2018년 절치부심하며 날마다 곱씹고 달려가야 하는 지침을 아로새겨야 합니다.
※ 성서가 증언한 밑힘으로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우리 세인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를 하면서 현장에서 배우는 강력한 주님의 가르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사람의 방법과 사람이 만든 스킬과 엔터테인먼트로 결코 서지 못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저 역시 젊은 시절, 이런 방법론에 몰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 보면 해 볼수록 느끼는 주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방법이 아니라 기초라는 사실 말입니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밑힘은 모두가 기초입니다.
뼈대입니다.
강원도 평창에 가면 겨울마다 얼음축제를 합니다.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얼음조각들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관광객들을 매료시킵니다.
얼음조각 자체도 환상이지만 그 안에 조명까지 곁들이는 신기술로 인해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음축제를 볼 때마다 저에게 오는 소회가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자태는 언제까지만 유효기간입니까?
겨울 내입니다.
온도가 올라가는 봄이 오면 이 얼음조각들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왜?
얼음은 얼음일 뿐 뼈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요즈음 저에게 잔소리를 한 것이 있습니다.
하체 근육이 너무 부실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저는 상체는 그런 대로 근육도 제법 있고 괜찮은데 하체는 영 파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앉아 있는 시간이 서 있는 시간보다 많고 운동을 해도 유산소 운동은 열심히 하지만 근력 운동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벅지와 하체 종아리가 빈약하자 매일 잔소리를 합니다.
노력해 보렵니다.
사람들의 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체 근력은 건강의 척도라고 말들 합니다.
그런데 이 공식은 영적 생활에도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성서가 증언 한 밑힘은 나를 영적으로, 교회를 영적으로 견고하게 만드는 하체 근력입니다.
오뚝이를 부도옹이라고 말합니다.
‘부도옹’을 풀이하면 아니 不, 쓰러질 倒 늙을 翁입니다.
결코 쓰러지지 않는 노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오뚝이가 쓰러지지 않습니까?
밑 정중에서 받쳐주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받쳐주는 밑힘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셨던 레마입니다.
그래서 저는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를 정하면서 밑힘이라는 단어 앞에 이렇게 수식어를 붙인 것입니다.
‘성서가 증언 한 밑힘’이라고.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 소개한 강수원 형제의 한 문장을 되새기십시다.
“요즈음은 고린도전서 강해를 통하여 오랫동안 묵은 나의 영적 암 덩이가 떨어짐을 깨닫고 두서없이 편지를 씁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형제의 영적인 오래 묵은 암 덩이가 떨어져 나가게 해 준 것은 프로그램, 상담, 내적 치유, 임파테이션(축귀 사역),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영적으로 승리하도록 만들어 준 것은 밑힘 곧 고린도전서 강해였습니다.
어찌 고린도전서 강해뿐이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일체의 말씀인 밑힘 레마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교우들이 2018년 한 해 동안 성서가 증언 한 밑힘으로 든든히 서 가는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이 땅의 동과서 남과북 가득한 죄악 용서하소서
모든 우상들은 무너지고 주님만 높이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지친 모든 영혼 주 예수 사랑 알게 하소서
저들의 아픔과 눈물 씻는 주님의 보혈 이 땅 치유하소서
성령의 새 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의 끝까지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주님만 섬기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주님 교회 위에 하늘의 생기 부어 주소서
열방을 치유하는 주 백성 주님의 군대 일으켜 주소서
성령의 새 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