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2017년 12월 25일 성탄절 설교 제목: 바르게 찾아야 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2:41-51 서론) 지난 주간, 교우들과 함께 하는 소그룹에서 함께 나누었던 화두는 ‘잘 살지 말고 바르게 살자.’였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우리들 중에 인생의 목적을 ‘잘 살자.’로 두고 살아가는 자들이 상당수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해서 가족계획도 세우고, 노후준비도 하고, 자식들에게 최대한 투자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소박한 목적이고 삶의 여정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 산다는 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잘 산다는 것의 일차적인 초점은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치중립적인 것이기에 그냥 그렇게 사는 평범한 일상입니다. 그러나 바르게 산다는 것은 목적이 내 중심을 뛰어넘어 타인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는 증거입니다. 타인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삶을 살아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갈 때만 이를 수 있는 삶이기에 바르게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바르게 사는 것이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상당히 신학적인 역학의 답변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살기위해서는 분명한 전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크로노스의 시간에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찾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요 과제입니다. 본론) 2017년 성탄절 아침에 읽은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12살 되는 해에 예루살렘으로 육신의 부모들이 어린 예수를 데리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헤롯 성전으로 올라갔다가 아들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한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들은 사방으로 아들 예수를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하다가 드라마틱하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성전에 다시올라갔다가 그곳에서 어린 예수를 만났다는 보고를 누가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헌데 오늘 본문으로 설교의 핵심적인 내용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눈에 크게 보이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본문 48-49절입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제가 이 구절에 주목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잃어버린 아들 예수를 사흘 만에 성전에서 우여곡절 끝에 찾은 뒤 끝내 섭섭하고 화가 난 나머지 아들을 책망하는 훈계가 48절에 기록되어 있고, 그 책망을 받은 아들 예수가 상당히 의외의 반응을 보인 내용이 49절에 병행되어 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저는 2017년 성탄절 아침에 주는 대단히 중요한 절기 설교의 교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48절을 다시 봅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마리아의 노여운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사흘 만에 찾은 아들에게 꾸짖는 일성이 이것이었습니다.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였습니다.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는 이들의 자식이었습니다. 흠잡을 만한 것이 없는 꾸짖음이요 이론적으로 해답과도 같은 질문이자 나무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의 반응이 생뚱맞습니다. 그러나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49절을 곱씹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육신의 부모가 나를 찾은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대단히 간단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웬 호들갑을 떠느냐는 반응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 아기 예수의 탄생의 의미는 물론 우리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21세기 현대 크리스천들의 인식과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갖고 있었던 인식의 차이와 오늘 우리들의 인식과 별 반 다름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는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 예수를 자기들의 것이라는 생각에 침잠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예수께서는 자기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두 생각의 차이는 그냥 그럭저럭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수월하게 넘어가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2017년 성탄절 아침, 예수를 바르게 믿으므로 그를 어떻게 추구하고 있느냐? 의 결정적인 해답을 알려주는 팩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바르게 추구하는 신앙과 그렇지 않은 신앙을 구분해서 성찰해 보십시다. 1) 예수를 바르게 추구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전술했듯이 이 신앙의 패러다임은 예수를 내 소유물처럼 여기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는 아들 예수를 찾고서 따끔하게 나무랐습니다.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였다.’ 내 소유인 네가 네 맘대로 행하여서 많이 화가나 있다는 표현입니다. 너는 내 소유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하고,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와야 하며, 내가 무엇을 요구하면 반드시 그 무엇을 성취해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제와 물리적 압박이 담겨 있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신앙을 갖고 있는 자들의 대부분의 성향은 주도권은 내가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언제나 고분고분하게 나의 말에 순종해 주어야 하는 마음씨 좋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요정 지니 같은 존재로 있어주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6:45-46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뒤에 곧바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선언입니다. 왜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던 벳세다를 즉시 떠나시려고 했습니까? 그 이유를 병행구절인 요한복음 6:15절이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그렇습니다. 오병이어의 축제가 끝이 났습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을 제외한 모든 벳세다 빈들에 있었던 사람들은 사뭇 흥분의 도가니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흥분은 주님의 제자들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벳세다의 분위기는 정치적인 일변도로 흘러가는 추세였습니다. 어떤 정치적인 면이었을까요? 벳세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엄청난 영향력을 제시하신 예수님의 행보는 이제 결과론적으로 유대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되는 막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벳세다의 빈들에 모여든 사람들의 상당수는 예수께서 주변 지역에서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의 모습을 눈으로 본 사람들과 또 그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은 주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정치적인 메시아일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던 바 오병이어의 기적을 눈으로 보면서 그들은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옹립하게 되면 지긋지긋한 정치적인 노예의 굴레에서 해방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서 주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주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강제적인 움직임들이 있었음을 요한이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다음의 단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붙들어' 여기에 억지로 '붙들다.'의 의미로 번역된 헬라어 '할파조‘는 그냥 붙드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가지고 붙들다' 의 의미가 더욱 가깝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벳세다의 사람들의 의도가 불순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벳세다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칩시다. 정말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기고 강제적으로 왕으로 옹립하려는 벳세다 민초들의 태도에 대하여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술한 마가복음 6:45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제자들의 태도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 어디에 있습니까? '재촉하사'에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종용하였습니다. 무엇을 종용하였습니까? 오병이어의 축제로 인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것을 보면서 대리민족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던 벳세다의 빈들에 거하고 있던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명령의 강도는 아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더 솔직한 말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있으면 예수님이 왕으로 추대될 것이고 왕으로 추대되는 주님으로 인하여 적어도 제자들 역시 내각에 각료 정도로는 임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다고 믿으면서 벳세다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그 벳세다를 떠날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단어의 함축적인 단어가 '재촉하사'입니다. 원어 성경에 기록된 '재촉하사'의 번역인 '아낭카조‘ 는 '강제로 무엇인가를 하도록 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본문에 적용하여 해석한다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곳을 억지로 떠나도록 강요하셨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근접해서 주님은 지금 당신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벳세다를 떠날 것을 강력하게 명령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 기사 뒤에 나오는 이 대목에서 오늘 우리들이 찾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줍니다. 이 땅에서의 유익을 위해 벳세다를 떠나지 않고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여 세속적 가치를 차지하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게 해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예수님이 내 소유이고,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으며,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로봇 예수님이 되기를 원하는 것과 별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들 중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인 자는 없습니다. 2017년 성탄절에 우리들이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경남에 소재한 모 대형교회 목사가 근래 세습을 완료한 서울 모 대형교회의 목회자를 두둔하고 나섰습니다. 그 두둔의 근거는 구약의 모든 제사장은 그 제사장의 권위가 세습되었다는 것에 두었습니다. 그 분의 논리는 그러므로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준 것은 제사장인 목사가 결정할 고유의 권한임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시비 걸지 말라고 경고하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을 빗대어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어느 정도 최소한의 예의와 신학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박함을 드러낸 엉터리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가 제사장이라는 성경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그러므로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비약은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곡해하는 무식함의 일례일 뿐입니다. 성경을 마음대로 자의로 해석하고 주무르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성육신하는 예수님을 짓밟는 일이며 동시에 곧 예수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일입니다. 예수를 바르게 추구하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 목사의 주관을 따르는 것도 아니요 교회의 권력에 무분별하게 복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한 목회자의 폭거에 가까운 설교는 매우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성탄절 아침, 이와 같은 잘못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추구와는 정 반대되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2) 예수님을 바르게 추구하며 찾는 신앙입니다. 본문 4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무엇을 소년 예수께서 부모에게 천명한 것입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왜 인정하지 못하십니까? 의 응대였습니다. 조금 더 자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들 예수는 육신의 부모에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라는 역설이지 않겠습니까? 내 주권을 인정하라는 에두름이 아니겠습니까? 부모들의 인간적인 테두리와 이론으로 나를 속박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을 왜 타박하는가? 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내용을 종합한다면 결국은 예수님을 바르게 추구하고 찾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정하라는 말이 됩니다. 말장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할 것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다른 불순물을 집어넣어 트집집지 않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3절을 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이 구절이 어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까? 나사렛입니다. 예수님의 제 2의 고향 말입니다. 예수께서 고향으로 가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6:2절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가르치신 것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입니다. 그 때 나사렛 사람들이 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본 것은 예수를 본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 목수를 보았습니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인 예수를 보았습니다. 자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예수의 누이들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을 바르게 보는 것은 예수님이 계셔야 할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고 믿는 시선입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심을 보는 것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은혜의 사실에 다른 것을 곁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으로 포장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1981년 구원받지 못한 육에 속해 있었던 었던 이강덕이라는 사람에게 직접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이강덕을 위해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강덕을 구원해 주신 주군이자 주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로 이 주님을 예수님으로 인정하는 것, 이것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더 포장되지 않으신 주님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오늘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신앙입니다. 어제 제천화재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를 다녀왔습니다. 29명의 고인들에게 헌화를 하고 29명의 영정 중에 고 박한주 목사, 고 박용재 목사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여 흐느꼈습니다. 밖에는 하늘도 슬퍼하는지 제천에서 흔치 않은 눈이 아닌 겨울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면전에 이렇게 독백했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시 만날 때는 기쁨으로 만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품에서 잠시 동안 쉬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이별의 슬픔 뒤에 다시 만날 재회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소망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엄연한 은혜입니다. 이 시대의 영적 비극은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 같은 것에 열광하는 비극입니다. 이 시대의 참담한 비극은 예수님도 괜찮지만 이것도 괜찮다는 유혹에 무너진 참극입니다. 이 시대의 울고 싶은 고통은 예수님보다도 괜찮은 것도 있다는 것의 강제력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하시는 유일한 주군이십니다. 내 집에 묶어두는 그래서 마음대로 조정하는 안전하고 편리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2017년 성탄절, 우리 주님을 바르게 찾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어제 친구가 페이스북에 이런 단문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 탄생, 세상과의 충돌” 기막힌 통찰입니다. 저는 친구의 이 글에 대하여 그가 왜 이런 글을 올렸는지 그 진정성을 올곧게 인정합니다. 제가 친구의 이 글을 이렇게 패러디해 보겠습니다. “예수의 예수됨 인정, 예수의 예수 같은 것과의 충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예수를 믿되 바르게 믿으십시다. 예수님을 날마다 찾으시되 바르게 찾으십시다. 아픈 성탄절이지만 나는 이 아픔도 보듬어주시는 주님의 주님 되심을 믿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