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9일 부활주일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15:12-19
제목: 불쌍한 자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서론)
책에서 읽은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24세에 사망, 70세에 묻힘”
미국의 어떤 공동묘지에 새워진 비석에 기록되어 있는 글귀라고 합니다.
너무 간단한 문구이지만 참 많은 여운을 남겨주는 묘비의 글이 아닙니까?
이런 추측을 하게 합니다.
여기에 묻혀 있는 사람의 비전은 이미 24세에 종말을 맞이했고, 그렇게 꿈이 없는 인생을 46년을 살다가 육체의 호흡도 마감하게 된 참 비극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가장 불행한 자가 누구일까를 질문하다가 이런 자답을 해보았습니다.
할 말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5월 5일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독서 여행의 텍스트인 소설가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는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 그녀가 말을 잃게 된 원인은 후천적 사건의 충격 때문입니다.
독서여행 때 자세한 리뷰를 나누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말을 잃은 여인의 일상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은 생각이고, 말하기는 인간이 인간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상실했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내가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가장 나다운 행위이자 표현입니다.
이 말을 상실했다면 그건 인간이 경험하는 아픔의 극치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차원으로 접근할 때, 본문은 2023년 부활주일 아침에 저와 여러분에게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준다고 할 수 있기에 교우들과 함께 부활주일 텍스트로 삼아 은혜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본론)
바울은 30세 어간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며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변곡점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분명한 경험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8절을 소개합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이후에 그의 전 인생을 요약한 것과 같은 옥고를 남겼는데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은 본인의 전 인생의 말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강력한 메시지의 요약이 바로 오늘 읽어드린 고린도전서 15:12-19절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메시지는 기독교가 기독교 되게 한 마그나카르타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는 엄청난 메시지이자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2023년 부활절에도 다시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하는 기독교인의 대 명제입니다.
동시에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히 해야 할 말이자 외침이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부활을 믿지 않은 자들이 팽배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C K. 바레트 교수는 국제성서주석 ‘고린도전서’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없고 그들의 영혼은 죽는 순간에 하늘로 들려졌다고 믿었다.”(p,397)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신자들 중에는 유대적인 사상 중에 하나인 부활사상이 아니라 헬라적인 철학 사상인 영혼 불멸 사상을 갖고 있었던 헬라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도리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아니라 죽는 순간, 영혼이 멸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헬라적인 신앙에서 양보하지 않았던 신자들이 있었음을 바울이 12절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이 구절을 접하는 우리들로 시선을 돌려보십시다.
교회 안에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라고 항변하고 싶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짜로 믿는가?
21세기 교회 안에 있는 신자라는 이름의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허다합니다.
이유를 추적해 보면 거의 대부분 산업혁명과 계몽 시대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시야와 안목을 크게 뜨게 해준 과학문명이라는 혁명적 발화점을 사람들이 겪으면서 기독교 문화 안에 있는 유럽에서 예수의 부활은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일이기에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몰아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과학적인 생각을 사고의 기초라고 믿는 신자들은 불편했던 예수의 부활 사건을 이렇게 되치기 했습니다.
몇 가지만 열거한다면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영혼불멸설 ② 시체 도적설 ③ 가사 소생설 ④ 전설설 ⑤ 집단 환상설 등등입니다.
이렇게 후대에 사람들은 과학주의의 창궐로 인해 예수의 부활을 정면으로 거부했지만 바울이 전했던 부활에 대한 선언은 후대의 사람들이 말하는 부활 거부론과 빗대어 볼 때 조금도 궁색하지 않는 선언이었으며 선포였습니다.
도리어 이 부활신앙은 교회가 가져야 할 복음의 정수이자 신앙의 핵심적 요체이기에 결코 물러서거나 타협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13-18절까지의 면면은 단호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한 바울의 이런 신앙적 심리를 엿보게 합니다.
13-18절을 다시 읽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지금 바울이 무엇을 선언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본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한 절대적인 사실임을 분명히 천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모든 신앙적인 내용이 헛것이라고 매우 강하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결론이 바로 본문 19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바울이 남긴 한 마디는 오늘 2023년의 부활절을 맞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해야 하는 영적 시금석을 삼아야 할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왜?
주께서 부활하신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이를 증명합니까?
1) 주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 이유는 빈 무덤에 관한 모순된 증언 때문입니다.
빈 무덤에 대한 기사를 4복음서 전체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4복음서를 비교하면 서로 맞지 않는 증언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한 때는 이런 맞지 않는 증언이 바로 부활이 전설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부활의 신빙성을 부인했습니다.
가령 마가복음에 무덤을 방문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샬로메라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 누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반면 마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라고 기록되었고,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서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4복음서 전부에 다름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차이가 나는 증언은 빈 무덤에 등장한 인물에 대한 묘사입니다.
마가는 흰 옷 입은 청년, 마태는 천사,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인들의 방문 시기도 차이가 있습니다.
안식 후 첫 날이라는 요일은 일치하지만 마가는 해가 돋을 때, 마태는 미명에, 누가는 새벽에, 요한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라고 각기 다른 기록을 남겼습니다.
결국 이런 차이는 제자들이 후대에 사람들에게서 전승된 전설이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비판자들은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도리어 드라마틱하게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복음주의 신학계는 도전합니다.
김영봉 목사의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빈 무덤을 예로 부활이 조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빈 무덤 전승이 조작된 것이라면 이렇게 허술할 리 만무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부활이 거짓이라면 기독교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거를 조작하려고 했다면 더 치밀했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활의 이야기만큼은 철저하게 입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사복음서에 기록된 빈 무덤 이야기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도리어 빈 무덤 이야기가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조작된 이야기라면 이런 차이점들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허술하게 조작된 이야기라면 진작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김영봉, “세상을 바꾼 한 주간”, IVP, 299.)
저는 네 개의 복음서 기자가 서로 다르게 부활과 관련된 보고를 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 김영봉 목사의 해석을 존중합니다.
미국 전직 대통령이었던 트럼프의 지난날의 행적이 도마에 올라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 역사상 처음 기소되는 일이 있었음을 외신을 통해 접했습니다.
이 일을 놓고 찬반 여론이 뜨겁습니다.
어디 이 일이 미국만의 일이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정치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사건과 사고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고 있는 일례는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해석의 차이는 있는 것은 그 해석을 불러온 사건이 말 그대로 팩트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역사적으로 있지 않았으면 해석의 무대에 올라오지 않습니다.
왜 부활이 역사적 사실입니까?
빈 무덤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자가 존재했다는 점이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대사건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임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의 삶을 살아내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이전 텍스트인 서론에서 읽었던 고린도전서 15:3-8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 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네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15:3-8절에 기록된 단어가 ‘보이셨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홉쎄’를 번역한 이 단어를 개역개정판 번역에서 ‘보이셨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단어는 예수의 부활 전에는 등장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단어는 부활한 그 어떤 존재가 자신의 부활을 나타낼 때만 쓰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당신이 다시 살아나신 이후에 당신을 당신의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현현(顯現) 즉 나타내 보이셨다는 증언입니다.
게바에게도, 12제자에게도, 500여 형제들에게도,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에게도, 그리고 바울에게도, 동시에 여인들에게도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이 부활 이후에 일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런 은혜로 이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부활하신 영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피상적인 일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로 증명될 수 있을까요?
너무나도 당연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2023년에도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삶을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증인이자 증거입니다.
직전 교회를 섬기던 청년 한 명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지방의 모 신문사에 재직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제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부임하시고 난 뒤에 여러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히 말씀 중에 삶과 말씀이 유리되어 있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듣고 깊이 절망했습니다. 나는 지금 신문사에 근무를 하면서 이모저모의 불의한 일들을 추적하고 기사화하는 그룹에서 일하고 있는데 모든 기사의 목적은 촌지를 뜯어내는 일입니다. 신앙인으로 내키지 않는데 조직에 몸을 담고 있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중에 목사님의 메시지의 상당수가 성서적 삶을 실천적 삶으로 연결하라는 메시지였기에 어떤 때는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목사님, 직장에 사표를 내면 하나님께서 제 인생을 새롭게 하실까요?”
제가 그 청년의 고민스러운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개 형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극복하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만에 하나, 형제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삶의 내용을 반성하고, 삶을 올바르게 되돌리려는 마음으로 직장에 사표 냈는데 그런 아들의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들이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형제가 결심한 내용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믿는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 청년은 주저 없이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신앙의 노정을 걸어가는 데에 미리 하나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직장에 들어갔고, 이후 그곳에서 만난 자매와 가정을 이루고 신실한 하나님의 아들로 섰음을 후담으로 들었습니다.
“어제는 아내와 함께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작년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부종이 왔는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치의의 말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아직 다음 치료 과정 계획은 잡지 못하고 약물치료로 두 달을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달에 머리 말고 다른 부분의 수술도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짠합니다. 사실 요즘 마음이 좀 무거운 게 사실입니다. 다시 쓰러지신 매형과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누나, 무릎 수술을 하고 재활중인 온 몸이 종합병원 상태인 하루하루를 기적으로 살아가는 동생까지 주변에 너무 아픈 가족들이 있어서 기도를 웬만큼 빡 쎄게 해서는 안 되는 현실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요즘 이 말씀이 내게는 엄청난 도전과 결단의 말씀입니다. 평생을 두고 너무 많이 듣고 결심하고 당연하고 마땅한 사명자의 고백으로 여기고 언제 어디서나 한 치의 의심이나 망설임 없는 기도라고 생각했지만 시련의 과정을 겪으며 잠시 잊었었고 지금의 현실 앞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계신 예수님께서 내게 매일 던지시는 과제입니다. 나는 정말 아버지의 잔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건지. 하늘 아빠의 원을 제대로 깨닫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눈물로 엎드립니다. 더 강력한 기도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약속의 말씀 의지하여.
김포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동기 목사가 단체 톡에 올린 중보기도 글입니다.
아무리 목사라 하더라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이런 싸움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우리 주변에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나의 동역자들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며 일하고 있다는 가장 결정적인 부활의 증거입니다.
마가복음 12:26 후반절-27절을 통해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면, 동시에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오늘 그 하나님은 나에게도 여전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결코 불쌍한 자들이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왜?
주님이 부활하셨고, 오늘도 내 삶의 현장에서 여전히 부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023년, 부활절입니다.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명제는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의 호흡이 끝나고 소풍을 마치는 그날까지 외칠 그리고 전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