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일 종려주일 설교
제목: 남은 고난을 내 것으로
본문: 골로새서 1:24
서론)
오늘은 2023년 종려주일이자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고난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1년 중에 성도된 자라면 마땅히 가장 경건한 마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고 성찰하며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는 절기의 절정기가 이번 주간입니다.
주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하셨던 요한복음 15장에서 대단히 선명하고도 적확하다고 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요한복음 15:13절을 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 구절을 적용해 볼 때, 우리가 이번 고난주간의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시금석이 될 만합니다.
주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정도가 아니라 전혀 자격 없는 저를 위해 믿음의 주체가 믿음의 객체를 위해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은 사랑의 극치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절정이 십자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펴 보이시기 위해 주님은 남김없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난의 끝에 말도 안 되는 구원의 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고난주일은 그 사랑의 시작점에 서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2023년 고난주간을 어떤 자세로 보낼 것인가 질문해 보며 오늘 이 시간을 마음을 다잡이 해 보겠습니다.
본론)
학자들은 대체로 골로새서의 집필 연도를 주후 58-64년 즈음으로 추측합니다.
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면 이런 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작성할 때는 그의 나이가 이미 시대적인 기대 수명인 약 50세를 넘겼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빌레몬 1:9절을 소개합니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바울은 빌레몬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은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이가 많은’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프레스뷔테스’는 당시 50-56세의 연령에 해당하는 자들에게 붙이는 단어임을 감안할 때 분명히 바울의 나이는 50을 넘긴 노년의 연령대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들이 이해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 년도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년도는 과연 언제 즈음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7장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행전 7:58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스데반에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그들의 옷을 벗어 사울 즉 바울의 발 앞에 두었다고 보고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로 이때 바울의 연령을 추론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울이라 하는 청년 발 앞에 두니라”
여기에 청년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네아니아스’는 그 시대에 29-35세에 걸친 연령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열거해 드린 빌레몬서, 골로새서, 사도행전의 성경적 내증을 감안할 때 사울의 회심 시기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한 시기는 예수께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지 불과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은 때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시기를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주후 33-37년 정도로 개진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지 얼마 후에 다메섹에서 회심을 했고, 이후 1-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예수의 구속의 은혜를 증언하는 이방의 사도로 사역하면서 그이 나이 50이 넘은 노년에 골로새서를 기록했다.”
이 정도면 큰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왜 오늘 고난주일에 바울의 연대기를 짚고 있을까요?
본문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앞에서 골로새서의 집필 연도를 58-64년 정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회심했던 29-35세라는 청년의 시기로부터 어림잡아 짧게는 20년부터 길게는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세월의 흐름을 경험한 뒤에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지체들에게 전했던 골로새서 메시지는 벅찬 감동을 자아냅니다.
그 연륜을 통해 바울은 깊은 영성과 신앙적 성숙을 경험했기에 골로새 교회 안에 있었던 신실했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⓵ 내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당하는 괴로움을 도리어 기뻐한다.
⓶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도 감당한다.
⓷ 앞에서 언급한 ⓵⓶는 순전히 주님의 몸 된 교회인 골로새 교회를 위해 나의 육체를 드린다.
이 세 가지를 전제할 때 2000년이 지난 오늘 골로새서를 읽고 있는 나와 여러분 모두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약 30년 지난 후였지만 바울은 이 명제에서 한 번도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는 교훈입니다.
어떤 명제였습니까?
※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바울의 이 정신은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도 적지 않은 귀감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의 남은 고난을 감당한다는 바울의 고백이 무엇을 전제하는 것일까요?
단언합니다.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계속해서 걷고 있으며 또 걷겠다는 결연한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의 걸었던 25-30년의 삶의 자국들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3-28절에서 이렇게 답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회심 이후 바울의 인생은 말 그대로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말이나 이론으로 형용하기에 부족한 고난을 고린도후서 11:23-28절 글로 이렇게 적시한 것입니다.
헌데 놀라운 바울의 후속 고백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남은 고난이 있다면 그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2023년 고난주일입니다.
2023년 고난주일이라는 말이 제게는 대단히 아리게 들립니다.
코로나 19라는 천재적인 변을 당한지 4년이라는 세월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의 피폐함이 교회를 강타했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삶 역시 정비례하며 무너졌습니다.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하지? 라는 볼멘소리가 전국 교회를 강타했습니다.
더불어 웬만한 권면이나 가르침은 코로나로 인한 세속적 마인드로 무장한 맷집까지 커져서 속수무책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기막힌 현실 속에 내동댕이쳐진 작금, 현직 목사로 사역하는 저로서는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2023년의 고난주일이라는 단어가 제게 더 아리게 들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코로나 이전의 영적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이 다시 옷깃을 여며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 시원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친구 목사가 언젠가 제게 이런 말을 전해준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처럼 고지식한 사람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 같다.”
저는 친구의 이 말이 반은 칭찬이고, 반은 질책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압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는 것은 목사로 부름 받고 사역을 감당하면서 목사로서 포기하지 못할 나름의 마지노선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적인 시원이 예수께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복음의 시원으로 목사나 성도의 삶이 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입니다.
어제 월삭예배 본문으로 유다서를 읽었습니다.
유다서가 작성되었을 때의 시대적 상황이 주후 1세 후반부터 2세기 초반(AD 80-120)으로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초대교회가 생성되던 초기였기에 교회마다 제대로 된 신학적 내용들이 잘 정비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기에 여러 이단 사상들이 교회에 침투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였기에 각종 이단들이 성행했고, 거기에 걸맞게 거짓 교사들도 판을 쳤습니다.
유다는 이런 위기 상황에 직면한 본인이 활동하던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명한 메시지를 선언하였습니다.
유다 1:4절을 다시 한 번 복기하겠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의 외침이 적절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자들을 경계하라는 메시지가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희석시키고, 퇴색시키는 일들에 대해 경계하라.
코로나 이후 성도가 편리주의에 함몰되는 것은 다반사요, 원색적 복음에는 혀를 내두르는 일들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시기적 민감함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생존 방법을 적절한 줄타기로 제시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성도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 복음을 제시하고 각종 엔터테인민트식의 프로그램과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는 프로젝트도 선보이곤 합니다.
그러기에 마크 뷰캐넌 목사가 말한 말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회의주의(懷疑主義)의 시대가 아니라 경신(輕信)의 시대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 p,106.)
저는 뷰캐넌 목사의 일갈에 1,000% 동의합니다.
믿음의 삶과 행동을 가볍게 여기는 천박한 시대,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하나의 쪽지에 기록된 고대 사관으로 치부해버리는 경박의 시대이기에 그는 이렇게 갈무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2023년 고난주일에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며 되새김질해야 하는 영적 다짐은 오늘 설교의 제목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것으로 삼겠다는 결단이요 실천 말입니다.
그렇다면 2023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것으로 삼겠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너무 불편하지만 복음의 정수이기에 선포합니다.
※ 편안한 복음을 버리기를 바랍니다.
20세기 복음주의 권의 최고의 설교자라는 명성을 얻은 존 스토트 목사가 이런 갈파를 했습니다.
“설교는 편안한 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편한 자들은 편안하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존 스토트, “설교” IVP, p,111.)
왜 존 스토트목사가 서로 대비되는 문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정의할 때 설교가 편안한 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임을 먼저 밝혔을까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순간 번쩍이는 소회가 임했습니다.
편안하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미암아 불편해지는 진짜 성숙을 경험하고 나서야 진정한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고 존 스토트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7:13-14절을 곱씹어 보십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앞서 설명한 존 스토트는 이 구절을 주석한 책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겨놓았습니다.
“협착으로 이끄는 문은 좁다. 그러므로 그 문을 발견하려면 잘 찾아야 한다. 놓치기 쉽다. 그 문에 들어가려면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가야 한다. 그 문은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존 스토트, “산상수훈”, 생명의 말씀사, 278.)
현대인들은 어려운 것에 진저리를 냅니다.
쉬운 것 놔두고 왜 눈을 뒤집고 찾아야 만이 찾을 수 있는 길을 가려고 하느냐며 반색합니다.
놓치기 쉬운 위험한 길이 아닌 찾기 쉽고 넓게 열려 있는 길을 선호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정서입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다.
찾기 쉽지 않은 길이기에, 놓치기 쉬운 길이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그 길로 찾아 오라고 하신 것인지 랜덤으로 사는 자도 올 수 있는 그런 쉬운 길이라면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이 외롭게 척박한 길로 떠나셨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던 때 개인적으로 이런 분이시라면 따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구절이 이 구절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15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펜데믹 이후, 세인교회가 싸워야 하며, 세인 지체들이 싸워야 하며, 이강덕 목사가 싸워야 하는 것은 편안한 복음에 안주하는 것이며, 추구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고난을 내 고난으로 접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앞에서 잡시 언급했던 마크 뷰캐넌의 일성이 큰 울림으로 공명됩니다.
“안전한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안전한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전하지 않은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덩달아 좋아하시지도,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덩달아 싫어하시지도 않는다.” (열렬함, p,84)
정말로 기막힌 성찰이요 교훈입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겟습니다.
줌으로 예배를 드리는 대만에 계신 장계란 권사님이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이 4월 2일인데 장 권사님의 소원은 이번 달에 한국에 나와 사랑하는 교회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려보는 것입니다.
장 권사님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한국행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섬겼던, 내가 사랑했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죽어도 좋다는 일사각오의 믿음 때문입니다.
3주 전부터 펜데믹 3년 동안, 단 한 주도 빠짐없이 궐석신자들에게 보내던 유트브 설교 동영상 송출을 중단했습니다.
그 동안 온-오프라인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설교라도 듣고 신앙의 끈을 놓지 말라는 담임목사의 진정성이 있는 애절함이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진정세에 접어들고 이제는 엔데믹 선포만 남은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 참석은 물론, 최소한의 성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자로서의 예의를 포기한 자들에게 더 이상의 설교 동영상 송출이 무슨 의미가 더 있겠는가 싶어 중단했습니다.
언젠가 교우들에게 전했던 한희철 목사가 쓴 1일 한 생각이라는 단상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일수록 상처는 많아 끌지 말고 업고 와야 하는 것은” (한희철, “하루 한 생각”, 꽃자리, p,464)
곱씹어도 감동을 주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아름다운 사랑을 악용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너무 편안한 길을 교회가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가르쳐야 하는 것은 업고 오는 것을 가르쳐야 하지만, 그 기저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져야 함도 가르쳐야 하는 것이 교회의 미션입니다.
적어도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시기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편리함에 안주하지 마십시다.
안락함이 주는 사탄적인 행태를 버리십시오.
나의 주군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기간 단 하루도 편리함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당신과 나를 위해 몸을 찢기셨고, 선혈이 낭자한 피를 흘리신 분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쓴 잔
주님의 쓴 잔을 맛보지 않으면/주님의 쓴 잔을 모르리
주님의 괴로움 당하지 않으면/주님의 고통을 모르리
주님의 십자가 져보지 않으면/주님의 죽으심 모르리
주님의 쓴 잔은 내 것이요/주님의 괴로움 내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