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영상

제목빈 들로 가는 교회2024-03-13 18:28
작성자 Level 10


기본 정보

설교제목
: 빈 들로 가는 교회
분 류
: 절기 예배
설교자
: 이강덕 목사
설교일
: 2023년 10월 29일
성경본문
: 누가복음 3:1-6

본문내용

 

2023년 10월 29일 종교개혁주일 설교

 

본문누가복음 3:1-6

제목빈 들로 가는 교회

 

서론)

 

오늘은 506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이라는 개신교가 기억하고 새겨야 하는 절기가 오면 근래는 매우 두려워지는 게 사실입니다.

이유는 개혁이라는 단어가 과연 우리 개신교회에 걸맞는 것일까를 질문할 때 매우 곤란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 한국교회를 개혁의 대상이 되어 있는데 그 개혁의 골든타임을 이미 놓친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개신교회를 일괄적으로 지칭할 때 영어 단어로 ‘protestantism’ 혹은 ‘the protestant’라고 합니다,

풀이하자면 저항하는 운동’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겁니다.

16세기 절대권력이었던 가톨릭 교회의 교회답지 않음에 대해 목숨을 걸고 반대하며 투쟁했던 사람의 무리들이 일으켰던 개혁 운동의 산실이 개신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1세기 오늘바로 이렇게 태동하여 만들어진 교회가 바로 개혁의 대상이라는 비난의 화살을 맞고 이런저런 이유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이 사실이 오늘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이 되면 웬만큼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이 섬기는 교회는 종교개혁주일은 괴롭지만역사의식이고 뭐고 전혀 관심이 없는 목회자들이 섬기는 교회는 수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종교개혁주일을 무시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바로 그날이 오늘 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제가 교우들과 함께 나누려는 이 설교 한편으로 우리 세인교회는 물론여타 한국교회에 어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종교개혁주일이니까 그냥 무시할 수는 없고 뭔가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사명감이 있어 절기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거창하게 기념하기 위한 포석의 설교가 아님을 전제하는 것은 설교를 하는 목사가 갖고 있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설교는 단순히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 세인교회가 가져야 핳 최소한의 마지노선적인 마인드를 점검하는 차원이 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1-20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유는 세례요한이 행한 설교와 그의 사역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은 세례 요한 활동을 시작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입니다.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주후 14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시기를 문자적으로 설정할 때 티베리우스 통치 15년이 되는 해이니까 주후 29년 정도로 산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해석도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성서적인 내증만을 전제하면 AD 29년 쯤으로 설정해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 해석이라고 여기기에 그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이 시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주후 26-36(37)까지 다스렸던 본디오 빌라도의 섭정시기였고헤롯은 주전 4년부터 주후 29년까지 갈릴리를 다스리던 분봉왕으로 재위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헤롯의 동생인 빌립은 레바논 지역인 이두래와 드라고닛을또 다른 동생인 루사니아는 다마스커스 북서쪽 지역인 아빌레네를 통치하는 시기였습니다.

정치적인 구도가 이런 반면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2절 전반절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두 명의 대제사장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데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공생애 기간 끝까지 예수님을 괴롭히고 핍박하고 결국 죽이는데 성공한 자로 계속 등장하는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

안나스는 주후 6-15년까지 유대종교를 장악한 자였고가야바는 안나스의 뒤를 이어 주후 18-36년까지 유대 종교의 실질적인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직을 수행했던 자입니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정치종교의 권력의 틀을 갖추고 있었던 주후 29년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있습니다.

본문 2절 후반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입니다.

정말로 전율할 정도로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세례 요한의 등장 시기입니다.

그가 등장할 때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정치종교적 틀이 견고할 때였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무시무시한 제도적조직적 통치 권력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엄청난 시기에 요한이 등장했음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요한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는 것을 보고한 글에서 여러분의 담임목사를 울컥하게 만드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보고인데 병행된 단어입니다.

빈 들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한글 번역본 성경 중에 본문 2절을 내 마음을 가장 뛰게 만든 번역본이 있어 소개합니다.

표준 새 번역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이 구절에 주목하고 전율하는 이유는 요한이 있었던 위치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요한이 있었던 장소를 에레모스라고 표현합니다.

누가의 번역으로는 빈 들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4절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똑같은 단어 에레모스를 마가는 광야라고 기록합니다.

이 점에 대해 부연하고 있는 주석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누가복음 3:3절에 의하면 요한의 활동지역을 좀 구체적으로 요르단 강 근처 지역이라고 제시된다이는 요르단 강 앞 쪽에 있는 지역을 가르킨다고 할 수 있다.” (하워드 마샬국제성서주석-누가복음, 168)

이 주석을 전제한다면 요한이 궁극적으로 활동했던 곳은 요르단 강 근처입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강이 있는 지역은 비옥합니다.

척박한 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광야로누가는 빈들로 해석한 에레모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한이 말씀을 받았던 초기 장소는 요르단 강 근처가 아니라 아마도 이스라엘의 남부 지역에 폭넓게 자리 잡고 있는 유대 광야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입니다.

약대 털옷이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던 척박한 땅먹을 수 있는 것리 석청 밖에 없었던 곤고한 땅인 빈 들에서 거주하던 요한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해석이 적절합니다.

김호경 교수는 이것을 지지합니다.

요한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공간은 빈 들에서 요단 강 부근으로 이동된다.” (김호경연세신학백주년기념성경주석-누가복음, 97)

안나스와 가야바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으리으리하던 장소인 예루살렘에 위치한 헤롯 성전이 아니라본디오 빌라도가 거주하던 가이사랴의 총독 관저가 아니라분봉왕 헤롯이 거주하던 헤롯 궁궐이 아니라 풀 한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던 땅사람이 도무지 살 수 없는 장소로 이미 버려진 땅 광야 즉 빈 들에 세례 요한이 거할 때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보고합니다.

또 한 가지, 2절에서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보고는 요한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목회자들이 많이 보는 스테파누스 헬라어 성경을 보면 레마 데우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눈여겨 볼 대목은 말씀이라는 단어를 신약성경이 기록할 때 통상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로고스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누가복음 3:2절에 기록된 말씀은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라는 단어에 눈이 크게 떠집니다.

레마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로고스로 오신 말씀 자체이신 예수께서 직접 해석한 말씀이 레마입니다.

다시 말하면 레마는 주께서 역동하셔서 해석한 감동적인 말씀을 의미한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전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름을 부으셔서 수많이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준 말씀이 바로 레마입니다.

세례요한이 요단 강 근처로 옮겨 세례를 베풀기에 앞서 전한 레마가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3-14, 16-17절입니다.

그 중의 일부인 3-6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앞서 말씀드린 오늘은 506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타락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성 베드로 성당 건축으로 상징되는 중세 종교의 타락의 그림자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회복 불능의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타락한 가톨릭을 반대하며 성서로 돌아가자고은혜로 돌아가자고믿음으로 돌아가자고 분연히 일어선 자들이 개신교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기개로 반기를 든 개신교들의 후예들인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그 기개와 정신은 이미 온데 간데 없어지고 다시 중세로 돌아간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감정이 이 목사에게 있는 것은 아픔입니다.

한국교회가 왜 종교개혁 정신을 잃어버렸는가!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제시합니다.

 

※ 교회가 빈 들이 아닌 헤롯 성전의 휘황찬란함으로 회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30-31절을 읽겠습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히 알고 있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가사라는 광야에서 아마도 70인역으로 추정되는 헬라어 유대인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을 본 빌립 집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내시에게 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여지금 형제가 읽고 있는 이사야 53:7-8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내시가 빌립에게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빌립이 그에게 이사야 53장에 기록되어 있는 수난 받는 종에 대한 메시지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8:35절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빌립이 가르쳐 준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된 내시는 곧바로 마차에서 내려 빌립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보고하며 이 메시지는 마감됩니다.

사도행전의 이 보고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⓵ 헤롯 성전 중심으로 막강한 유대 종교 권력을 휘둘렀던 산헤드린 종교의 영적 무기력을 알게 해줍니다.

 

적어도 에티오피아에 살던 권력의 상층부에 있었던 내시는 당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주변 열강들이 사용하던 국제어였던 헬라어로 번역된 70인 역 유대인 성경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읽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인 헬라어 유대인 성경을 읽었던 내시는 무려 1,500KM를 상회하는 예루살렘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이유는 너무 간단합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먼 거리를 목적을 갖고 여행하였건만 막상 예루살렘 해롯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 종교 집단은 내시의 그 목적에 부합하는 그 무언가를 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이사야 53장에 기록되어 있는 수난받는 종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 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무능력하고무기력한 그들에게 내시가 전혀 영적인 답을 찾지 못하고 낙향하는 중이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물이었을 것입니다.

 

⓶ 내시가 궁금해했던 것을 해결받은 곳이 바로 가사라는 광야였다는 사실에 전율합니다.

 

빌립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지시하심에 따라 미리 도착하여 내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장소는 가사 광야였습니다.

빌립이 사역했던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56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여기서 정보 하나예루살렘에서 가사까지 거리는 직선거리로 96KM 정도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 가사에서 사마리아까지는 150KM를 넘나드는 거리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가사는 광야지역입니다.

150KM나 되는 광야로 사역 장소를 빌립에게 이동하라고 말씀하신 성령그리고 에티오피아로 내려가는 도중 내시가 약 100KM나 떨어진 가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오늘 우리들이 얻는 영적인 도전이 있습니다.

광야의 중요성입니다.

빈 들의 중요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시로 하여금 이사야 53장을 읽게 만들었던 곳이 광야였다면빌립으로 하여금 성령의 지시를 통해 이사야 53장의 레마를 알게 하신 곳이 광야라면 그 광야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지 않겠습니까?

2023년 종교개혁주일 아침에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이 상기하고 복기하며 또 명심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 세인 교회도 빈 들에 있을 때 레마가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최적으로 만들어지고즐기기에 안락하기 그지없고최고의 돌비시스템을 자랑하는 서비스 하드웨어가 구비되어 있는 오늘의 헤롯 성전에 하나님의 말씀은 공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람이 불고전갈들과 독사들이 우글거리며모래 폭풍으로 눈 뜨기조차 힘든 척박한 땅먹을 물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은 영적 헤브론 땅인 빈 들에 교회가 거할 때 대단히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레마가 공급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입니까?

빈 들에 있는 교회입니다.

어떤 성도가 살아 있는 성도입니까?

광야에 있는 성도입니다.

종교 사회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종교는 반드시 문화화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20세기 말까지 할로윈 데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던 상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서구 선진국에서 먹고살기에 문제 없는 사람들에 의해 즐길 거리 정도로 치부되던 것이 할로윈 데이라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1인당 국민소득이 20,000불이 넘자마자 할로윈이 대한민국의 문화적 축제일로 무대 위에 올라섰습니다.

그것이 신학적 담론에 있어서도 매우 비성서적일 수밖에 없는 할로윈 데이의 논쟁을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이 왜 오늘 2023년에 이리 뜨거운 논쟁이 되었는가?

그것은 먹고살만해진 우리나라의 문화요오락이요레저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말로 염려하는 것은 국민 소득 30,000불은 넘긴 우리나라의 상황과 맞물려 교회도 그렇게 변질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 앞마당에는 벚꽃 나무가뒤마당에는 느티나무가 15년 만에 늠름하게 자라 그 뿌리가 이제는 땅을 뚫고 나올 태세를 보일 정도로 튼실해졌습니다.

기실뒤마당에 있는 느티나무는 세 번째만에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지금 느티나무가 심겨져 있는 부분에 물이 흐르고 있어 두 번에 걸쳐 심은 나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물 때문에 고사했습니다.

원인을 알고 난 뒤에 지금 심은 세 번째 느티 나무는 땅을 돋은 뒤에 심었습니다.

그러자 15년 동안 튼실하게 자라주었습니다.

앞뒤마당의 나무들이 이제는 어엿한 단풍이 들어 어김없이 이 때 쯤이면 멋을 뽐냅니다.

매년 이 도식은 바뀌지 않고 정확하게 절기에 맞추어 옷을 갈아 입습니다.

왜 나무들이 정확한 시기에 옷을 갈아 입습니까?

뿌리 즉 이 튼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末 즉 열매나 잎사귀는 뿌리가 계절에 따라 명령하는 대로 변질되지 않고 순종하며 옷을 갈아 입습니다.

본말이 전도되지 않으면 변질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본말이 전도되면 반드시 변질됩니다.

나는 교회의 본말이 전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11월 11일은 담임목사와 함께 떠나는 독서여행 일입니다.

지난 주간, 2023년 교회 김장 사역은 11월 11일이 최적일인데 교회 행사가 있어 실무자들이 곤란해 한다는 보고를 아내에게 받았습니다.

날자를 변경할 수 있겠느냐는 타진이었습니다.

오늘 광고에 나간 것처럼 독서여행을 순연하기로 했습니다.

왜 이렇게 변경했을까요?

리더십이 흔들리기 때문입니까?

그럴 리가요.

교회 김장과 독서여행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아닌 것들로 인해 교회 사역에 혼선이 있다면 백 번도 바꿀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인 본질을 흔드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건 싸움의 대상입니다.

교회가 빈 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본질입니다.

나는 세인교회가 빈 들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해롯 성전을 추구하려는 일체의 것들에서 돌아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인교회가 안락하고 편안한 장소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인교회가 빌립이 있었던 가사에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인교회가 빈 들에 있었던 요한에게 임했던 레마가 임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는 설교를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다시 한 번 교회의 옷깃을 여미는 506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광야를 지나며라는 찬양의 가사가 다시 떠올라와 함께 부르고 마치고자 합니다.

찬양의 가사가 이론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신앙적 삶의 체험 현장이기를 바랍니다.

 

찬양합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어두움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곳/광야 광야에 서있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어두움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곳/광야 광야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 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광야 광야에 서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내 꿈도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